높이 20미터 추정 가야 목탑터 발견 (+ 최초 가야건물터) 역사뉴스비평

한국 건축사상 최초로 5일전 가야의 건물터 (목탑터)가 발굴되었습니다(!). 우선 뉴스 일부를 보시지요.

초석하부 지탱하는 적심석 사용
적심규모 고려 높이 20m 예상

가야 왕궁지와 가야불교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목탑지가 김해시 봉황동 303-7번지 매장문화재 발굴현장에서 확인됐다.

이는 발굴 주체인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원장 조수현)이 확인했다. 연구원은 이 건물지가 김해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가야시대 건물지라고 밝혔다.
중략.

평면 형태는 정방형으로 중앙에 네 개의 기둥을 가진 중심부와 이를 둘러싼 외부공간인 퇴칸을 뒀다. 퇴칸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길이 10m, 너비 10m 정도로 추정된다. 한반도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건물지 서편은 조사하지 않아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건물지 중심부에 사용된 적심의 규모가 지름 180㎝, 깊이 100㎝에 달하고, 중심부 건물이 사천주(四天柱)와 유사한 것으로 확인된 점을 고려하면 목탑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조사지역(김해 봉황동 유적의 동쪽)은 건물지 서쪽 경계를 이루는 소방도로 개설 때 가야시대 토성지 일부가 확인된 곳이다.
한반도문화재연구원 측은 이 건물지를 금관가야 왕성으로 추정되는 봉황토성 내에서 확인된 최초의 가야시대 적심건물지로 추정했다. 또, 탑형 건물지나 왕실 종묘와 관련된 건물지로 추정했다.

경주대 오세덕 문화재학과 교수는 "경주 나정(사적 제245호)에서 확인된 팔각 건물지처럼 평면 팔각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계획된 적층 건물과 같다. 건물 중심부와 퇴칸 사이의 간격이 넓고 차양 구조가 발달한 남방계열로 확인된 적심의 규모 등을 고려했을 때 건물 높이는 20m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로써 김해시가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왕후사와 호계사 등 가야사찰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추진 중인 가야사 복원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시는 그동안 설화나 조선시대 이후 기록 등 제한된 사료만으로 폐사지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시는 왕궁지로 추정되는 일대에 왕실 사찰이 자리했을 가능성이 큰 점을 고려해 봉황토성지에 포함된 구역을 문화재 지정구역으로 확대해 정비해 나갈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가야 왕궁지와 가야불교의 실체를 밝힐 것으로 기대되는 중요 유적이 확인된 만큼 유적의 보존과 활용 문제를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는 김해 원도심 재생사업의 하나로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고자 진행했다. 현재 50%가량 조사가 진행된 상태인 점을 고려해 시는 조사 완료 이후 문화재청과 보존방안을 본격 협의할 예정이다.

SBS 뉴스 영상

가야건물터가 최초라니, 그간 하나도 없는 줄은 몰랐습니다. 굉장히 의미깊은 발굴이네요. 거기다가 '목탑터'로 유력하다니 더 흥미롭습니다. 20미터 높이면 분황사 모전석탑의 원형 (15.5미터 추정)보다도 훨씬 큰 규모입니다.
이제 50%발굴이라니 앞으로 더 주목되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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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참고로 기사에 나오는 가야 사찰들 (왕후사, )에 대한 삼국유사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후사의 경우 452년(5세기중엽)에 지어진 곳이므로 시기상으로는 위의 목탑터 (5세기~6세기초추정)과 일치합니다.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왕후사의 창건과 폐지(0452년 (음))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매우 숭상하였는데 시조모(始祖母)註 540허황후(許皇后)註 541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元嘉)註 542 29년 임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註 544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은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표(標)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가야초기의 기록에 '호계사'가 등장합니다.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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