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무시한 규모의 연복사 5층 목탑 (사용된 목재기록으로 본)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현재 개성에 있었던 지라 현대 한국에 황룡사 목탑보다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한국 고대건축사의 1순위를 다툴만한 장엄미를 보유했던 목탑 혹은 고층전각이 있었으니,

바로 '연복사(보제사) 5층 목탑/ 5층 전각'입니다. 

이 거대건축물에 대해서는 그동안 5편의 포스팅 시리즈를 통해 남아있는 문헌사료를 바탕으로 여러 이야기를 해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 연복사 5층목탑은 건설할 때 어떤 규모의 목재가 들어갔는지에 대한 사료를 만나게 되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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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복사 5층목탑의 어마어마한 규모

1123년 북송의 사신으로 왔던 서긍의 눈에 비친 광통보제사(연복사)의 규모는 이러했습니다.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고려도경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 정전을 보유한 대사찰인 보제사(후일: 연복사)에는 5층탑이 있는데 높이가 200척이 넘는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중국의 사신이 눈으로 보고 적은 기록인지라 과장할 필요도 없었을테니 분명 200척이상 즉, 66미터 이상의 어마무시한 규모가 맞다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 고전번역원측에서는 굳이 이걸 '아마도 과장된 기록으로 보인다'라는 쓰잘데기 없는 주석을 달아놓았더군요- 이에 대해선 추후 다른 좀 더 깊은 주제로 비판할 생각입니다).

앞선 포스팅들에서 필자는 66미터가 넘는 목탑이 5층이 되려면 구조적으로 적어도 한층의 공간이 현재 한국최고(가장 높은) 목탑인 보탑사 3층목탑에 비근할 것이란 추정을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적 특징과 문헌기록을 통해 '탑'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 건축물은 '전각'에 가까웠을 것이란 추정도 한 바 있습니다.

보탑사 3층목탑 (42.7미터, 층 평균 10.9미터)


그럼 이렇게 평평한 (즉 한층한층이 비슷한 모습) 건축물이었느냐,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근거로 필자는 다음의 기록을 듭니다.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김자수(金子粹)의 상소(上疏)

공양왕 3년(1391)에 대사성 김자수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연복사(演福寺)의 탑을 수리하여 넓히느라 민가(民家) 3, 4십 호를 허물었습니다." 


[임하필기]에 나오는 고려말기 (생몰년대미상)의 문신인 김자수의 상소문입니다. 여기보면 '연복사 탑을 넓히느라 민가 30-40채를 허물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목탑의 평지 규모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지요. 위의 보탑사 목탑을 지으려고 민가 30채 이상을 부술 필요는 없습니다. 즉, 이렇게 되면 아래층이 가장 크고, 위로 갈수록 줄어드는 형태의 목탑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민가 30-40채를 헌 터위에 60미터 이상의 건축물을 지으려면 과연 그 '목재'는 어느정도 들었을까요? (연복사 목탑을 세우는데 쓰기 위한 목재를 수급하기 위해 저 민가들을 헌것이 아니고, 터를 잡은 것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다음 기록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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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의 정도전 부분에 그 근거가 나옵니다. 

고려사 > 권119 > 열전 권제32 > 제신(諸臣) > 정도전 

정도전이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로 임명되다

왕이 남경(南京)으로부터 개경(開京)으로 돌아오다가 회암사(檜巖寺)에 들렸는데 〈왕 자신의〉 탄신일이기에 예불(禮佛)을 올리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飯僧]하였다. 정도전이 말하기를, “탄신일에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비록 옛 전거(典據)에는 없습니다만 단지 신하들에게서만 나온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스스로 복을 빌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사옵니다.”라고 하였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왕이 연복사(演福寺) 탑전(塔殿)을 지으려고 경기(京畿)와 양광도(楊廣道)의 민(民)을 시켜 나무 5,000그루를 실어 오게 하니 〈실어 나르는〉 소가 모두 죽어 민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정도전이 그 피해를 극언(極言)한 후 곧이어 병을 구실로 사직(辭職)을 청하였으나 〈왕은〉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王欲營演福寺塔殿, 令京畿·楊廣民, 輸木五千株, 牛盡斃, 民甚怨之. 


輸木五千株, 나무 오천그루를 실어보내니
牛盡斃, 소들이 힘이 쇠진해 죽다.

네, 경기도와 양광도의 나무 5천그루를 실어 옮겼다고 나옵니다. 연복사(보제사) 목탑의 건립시기는 12세기입니다. 이 시기는 황룡사 9층목탑을 재건하던 시기와 일치하며 시대의 주력 수종은 참나무(Oak)였지요. 그럼 참나무 한그루의 평균무게는 얼마냐, 소나무와 비슷하게 1톤가량이 됩니다. 또한 요즘 나오는 여러 연구결과를 보면 12세기의 수종이 17세기 이후의 수종보다 더 크면 컸지 절대 작은 나무들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위의 현대에 건립된 보탑사 3층목탑 탑을 세우는데 어느정도의 목재가 들어갔을까요?

보탑사 목탑의 경우 8톤 트럭 1백50여 대분의 강원도 소나무와 10만여장의 기와가 들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장한 소나무 평균무게를 1톤으로 단순하지만 잡고 보탑사 3층목탑을 만드는 데 쓰인 목재양을 대강의 계산으로 최대로 잡아보지요. 1톤= 소나무 한 그루라고 하고, 최대 8톤에 8그루. 그럼 8 *150= 1,200, 즉 1천 200그루의 소나무가 들어간 것이 됩니다.

그런데 고려 연복사 5층목탑의 경우 (아마도) 참나무나 소나무 계열의 나무 5천그루가 들어갔습니다. 즉, 아주 간단하게 계산하면 고려시대 연복사 목탑에는 보탑사 목탑의 무려 4.2배의 수량이 들어간 것이 됩니다. 

민가 30~40채를 헐고 그 터에 세웠으며 높이는 66미터 이상급, 그리고 들어간 목재가 5천그루의 나무로 현재 한국최대 목탑인 보탑사의 4배. 가히 상상이 안가는 규모의 목탑이 바로 연복사 5층목탑이었습니다.

우리는 황룡사 9층목탑, 그리고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미륵사 9층목탑까지를 한국 고대-중세 건축중 대목탑의 상징으로 생각하지만, 사료에 남아있는 건축물의 경우, 현재 북한지역에 있긴 하지만 결코 연복사 5층목탑을 등한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위의 시리즈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연복사 목탑의 경우 황룡사 목탑보다도 훨씬 더 스펙타클한 문헌기록(스토리)가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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