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고기를 안먹었다? 고려초 육류도 시장에서 구입.

흔히 고려시대는 불교를 믿었고 그래서 육식을 아예 안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뿐 아니라 귀족층이나 왕족들도 고기를 안 먹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그리고 500년이나 되는 고려시대중 일부의 기록을 보고 마치 그 어마하게 긴 세월 내내 고려인들은 육식을 안했으리라 뭉뚱그려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한국학에서 바라보는 고려시대의 육류소비에 대한 관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1)계층 (대중, 귀족)과 2)시대별 양태는 더 치밀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기록이 있으니 바로 [고려도경](1127년)의 이 두 부분이지요.

======
선화봉사고려도경
어(漁)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중략.

선화봉사고려도경 
도재(屠宰)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보시다시피 '양이나 돼지는 백성은 안먹지만 왕족이나 귀인(귀족)들은 먹는다'라는 반증이나 다름없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또한 재미있게도 '소'가 아니라 '양과 돼지'("羊豕")입니다. 다만, 중국고대문헌에서도 소양돼지를 이런 식의 표현으로 묶어서 '육류'(살아있는 동물)로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지라, 이것이 말그대로 양과 돼지만을 뜻하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신이 와야만 서툴게라도 육식을 준비한다는 맥락이지요.
우선 이 기록(고려도경)은 1127년의 기록입니다. 즉 12세기초로 고려시대중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더 앞선 시기인 고려초 기록중 흥미로운 부분을 [고려사]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귀족이나 왕족계층에서는 육식을 생각보다 많이 소비했을 가능성이 있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968년의 기록입니다.

고려사
광종 19년(968) 무진년

○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인 후 양심의 가책을 받고는 죄를 씻어보려고 재회(齋會)를 크게 열었다. 이에 무뢰배들이 거짓으로 승려 노릇을 하면서 배를 불리고자 했으며 구걸하는 자가 모여들었다. 어떤 때는 떡과 쌀과 땔감을 서울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곤 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방생하는 곳을 줄줄이 설치하고 부근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론케 했으며 도살을 금지했기 때문에 왕의 반찬으로 쓸 고기도 시장에서 사다가 올렸다.

十九年 創弘化·遊巖·三歸等寺. 以僧惠居爲國師, 坦文爲王師. 王信讒多殺, 內自懷疑, 欲消罪惡, 廣設齋會. 無賴輩詐爲出家, 以求飽飫, 匃者坌至. 或以餠餌米豆柴炭, 施與京外道路, 不可勝數. 列置放生所, 就傍近寺院, 演佛經, 禁屠殺, 肉膳亦買市廛以進.
=======

자 다시볼까요?

肉膳亦買市廛以進 고기반찬을 또 시장에서 사서 올렸다.

肉 고기 육
膳 반찬 선
市 시장 시
廛 가게 전

사신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왕(광종)의 식사'를 위해 고기반찬을 '시장가게'에서 구입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기록은 서긍이 고려를 방문한 1127년 (고려도경)보다 241년이나 앞선 시대입니다.

즉, 이 고려초때만 해도 고기반찬이 사신이 올때나 왕궁에서 직접 서툴게 양/돼지를 때려잡는 수준이 아니라 '시장의 반찬가게'에서 구입하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고기반찬을 가게에서 구입한 '이유'가 광종 19년인 이 해에 그가 죄를 씻어보려 '불교의 재회'를 크게 열어 그 기간동안 특히 도살을 금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즉, 반대로 말하면 평소에는 불교와 관계없이 도살을 엄격하게 금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 구절은 [고려사절요]에도 다시 나옵니다.

고려사절요 제2권 /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임오 원년(982), 송 태평흥국 7년ㆍ요 건형 4년

또 살생을 금하여 어주(御廚)의 육선(肉膳)은 재부(宰夫 음식을 만드는 하인)를 시켜 짐승을 도살하지 않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으며, 대소 신민이 모두 다 참회하도록 하여 미두(米豆)ㆍ시탄(柴炭)ㆍ마료(馬料)를 운반하여 서울이나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又禁殺生,御廚肉膳,不使宰夫屠殺,市買以獻,

御廚肉膳 고기반찬을 부엌에서 준비못하고
市買以獻 시장에서 (구해서) 바치다.
======

마무리

고려 문화사의 경우 정치사보다도 그 자료가 턱없이 부족, 많은 부분을 중국사신의 눈인 [고려도경]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보고 들은 것은 '왕궁'에 초대되어 매우 협소한 부분만을 보고, 또한 1127년이라는 특정 해의 기록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 기록들이 마치 무려 500년 (말이 500년 쉽게 이야기하지, 대한민국의 역사를 5배이상 곱해야 나오는 길이의 시대)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시대의 '고려문화'를 모두 포함하는 식의 생각을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이는 오늘 기록처럼 분명 지양해야 하는 태도라 사료됩니다. 대중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덧글

  • 김대중협정 개정 2019/12/13 09:39 #

    도축을 금기시하는 경향은 불교 뿐만 아니라 농경 문화도 크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그러한 것들이 과장되고 변질되어 왜곡된 인식을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농경문화의 영향은 아주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고사기(712) - 天之日矛
    그 남자는 산과 계곡 사이에 있는 밭을 경작하고 있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에게 줄 음식을 소에 싣고 밭에 가다가 천지일모를 만났다. 그가 "음식을 소에 싣고 계곡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소를 잡아 먹으려는 것이로구나." 하고 그 남자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으려 하였다. 그 남자가 "소를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밭에 음식을 나르려던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풀어주지 않았다. 그 남자는 허리에 차고 있던 옥을 풀어 왕자에게 바쳤다.
    http://qindex.info/i.php?f=7560#7649
  • 역사관심 2019/12/18 10:53 #

    정보 감사드립니다.
  • 냥이 2019/12/13 10:42 #

    고려때 도축방법(네발을 묶고 불에 던져넣기)을 보고나니 조선때 도축방법도 궁금해지군요.
  • 역사관심 2019/12/18 10:54 #

    조선시대의 도축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발전했지요. 도축법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시대였으니...
    http://luckcrow.egloos.com/2656620
  • 소시민 제이 2019/12/13 18:15 #

    저렇게 고기가 귀했으므로 고기 세트는 언제나 먹히는 뇌물이었습죠.

    조선도 유교의 영향으로 소고기를 극도로 자제하는 기조로...
    농경으로 그리 모질게 부려먹고 잡아먹는게 도리가 아니고 송아지가 먹을 젖을 사람이 먹는건 도리가 아니라 했기에 소비층은 역시 극상층부로 국한되었죠.

    궁중요리만 쇠고기와 타락죽이라는 우유를 이용한 요리가 있는건 이런 이유죠.

    아무튼 이래서 조선시대에도 선물은 쇠고기 세트가 왔다 였다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9/12/18 10:54 #

    육류는 무지하게 좋아들 하셨다는. 생각보다 고기소비는 활발했던 게 조선시대였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http://luckcrow.egloos.com/2656620
  • 제비실 2019/12/13 19:52 #

    고려시대의 육식은 불교 체제로 인해 대중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러나 불교 교리도 시대와 집단에 따라 원 교리가 변형되어 퇴색 해석되어 인용되는 경우가 많듯이 불교 국가체제라도 육식이라는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오랜 식습관 관행 풍속을 근절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지요

    고려시대의 도축은 불교 국가의 특성상 수도 개경에서 행해지기는 사회 분위기상 어려웠을 것 같기에 지방이나 여진 거란과 인접한 북방 국경 지대 같은 지역에서 많이 행해졌을 것이고

    서긍의 고려 도경에는 자국 북송 사신이 이르면 고려에선 북송 사신 대접을 위해 도축하여
    대접한 고기들이 냄새가 심하여 품질이 나쁜다는 기록은 북송 사신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객관성 없이 서술될수도 있기에 신빙성이 그다지 완벽한 편은 아니지요

  • 역사관심 2019/12/18 10:55 #

    네, 문화사라는 게 결코 단순하게 볼 수 없는데, 서긍의 기록만으로 고려 500년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는 걸 종종 보곤 합니다.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 쿠사누스 2019/12/14 07:26 #

    까마구둥지님의 글을 읽고 보니, 고려도경이 정강의 변 그 무렵에 저술되었군요.

    지금 정강의 변이 있기 직전의 벨에포크(?) 무렵의 개봉의 도시풍경을 저술한 맹원로의 동경몽화록을 며칠 전부터 읽고 있는데, 고려시대도 동경몽화록같은 책이 하나 저술되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면 정말 좋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고려도경만으로는 사료가 너무 부족해요 ㅠㅠ
    게다가 장택단의 '청명상하도'처럼 개성 송악의 시정 모습을 그린 그림도 하나 전해져 내려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도 드네요.....쩝
  • 역사관심 2019/12/18 10:57 #

    예전부터 하는 생각이지만 대체 우리는 왜 그리 회화(특히 진경)가 없었는지... 조선시대에 화원을 천시하는 건 잘 알고 있지만...이웃국들은 수백년씩 된 그림도 잘만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http://luckcrow.egloos.com/2147550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