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26)- 흥왕사의 금으로 만든 13층탑 한국의 사라진 건축

현재 북한땅에는 사실 만약 지금도 우리땅이었다면 황룡사나 미륵사 혹은 그 사찰들의 보물인 목탑이나 석탑들만큼이나 많이 알려져 있을 문화재가 그득합니다.

그중 한 사찰이 바로 비공식 한국역사상 최대거찰이었던 개성의 '흥왕사'지요. 이 거대사찰에 대해서는 [한국의 거대사찰]시리즈에서도 아주 초창기에 2번째편으로 다룬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찰의 대표거대건축으로 대미륵상이 모셔져 있던 3층누각 "자씨전"을 따로 다룬바 있습니다.


그런데 흥왕사에는 황룡사 9층목탑만큼이나 알려질 수 있는 어머어마한 보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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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왕사 13층 금탑

[고려사] 문종 32년 즉, 1078년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고려사 > 권9 > 세가 권제9 > 문종(文宗) 32년 > 7월 > 
흥왕사 금탑이 완공되다
1078년 7월 미상(음)

是月, 興王寺金塔成, 以銀爲裏, 金爲表, 銀四百二十七斤, 金一百四十四斤.
이 달에 흥왕사(興王寺) 금탑(金塔)이 완공되었는데, 은으로 내부를 만들고 금으로 표면에 입혀서 은이 427근이고 금이 144근이 사용되었다.

흥왕사 금탑을 만들었는데 내부는 '은'으로 외벽은 '금'으로 입혀서 각각 427근의 은과 144근의 금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연구에 따르면 고려대의 1근은 641.946g입니다. 따라서 내부를 장식한 은은 약 275킬로그램 외부에 장식한 금은 약 92.5킬로그램이 됩니다.

참고로 이런 모양은 아니었겠지만, 현재도 금탑은 간혹 존재하니 아래는 합천 법연사에 있는 쌍금탑입니다.

합천 법연사 쌍금탑

하지만 저 탑의 도금규모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해외에 그 도금의 규모를 간접비교해 볼수 있는 건축물이 있으니 도금으로만 500킬로그램이 들어간 인도의 암리차르 황금사원입니다. 500킬로그램의 도금은 90년대에 완전히 다시 한 것이고 원래는 1830년에 162킬로그램의 도금이 되어 있었기에 총 662킬로그램의 도금으로 완성된 사원입니다.
단순계산으로 하자면 흥왕사의 13층금탑은 이 건물의 92.5/662=13.97, 즉 약 14프로정도의 금이 사용된 셈입니다. 이쪽은 대사원건물이고 한쪽은 금탑으로 생각하면 이 건물을 얼추 가로로 10등분해서 (높이는 비슷하게 하고) 자른 탑을 상상하면 들어맞게 되지요.

그리고 잊으면 안되는 것이 내부장식. 내부는 온통 '은'으로 발랐으니 그 양이 무려 275킬로그램이었습니다 (사용된 금의 약 3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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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완공시기? (1067 혹은 1078년?)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완공기록입니다. 앞서 살펴본 고려사기록에서는 문종32년인 1078년에 완공된 것으로 나오는데 아래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면 그보다 앞선 1067년 2월에 만든것으로 나옵니다. 금/은 양이 똑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탑임에 틀림없는데 말입니다.

동사강목
정미년 문종 21년(송 영종 치평 4, 거란 도종 함옹 3, 1067)
춘정월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니 연등회(燃燈會)를 특설하였다.

2월 사유(赦宥)하였다.
절이 낙성되었는데, 무릇 2천 8백간이며 12년 만에 준공한 것이다. ... 중략. 불사(佛寺)의 성대함은 고금에 없던 것으로, 금탑(金塔)을 만드는 데에 은 4백 27근으로 속을 만들고 금 1백 44근으로 겉을 만들었으며, 또 탑을 보호하는 석성(石城)을 쌓았다.

그나저나 흥왕사의 규모는 진짜 상상을 초월합니다. 2800 칸...

이 기록에는 고려사에는 없는 한가지 정보가 더 나오니 바로 '탑을 보호하는 석성(돌성)'을 쌓았다는 부분입니다. 즉 금탑을 지키기 위해 둘레에 돌로 일종의 방어막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런 방식의 건축은 어디서도 본적이 없어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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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탑을 궁전으로 옮긴 고려왕비

이 금탑을 충렬왕의 비였던 원성공주 (그리고 고려의 첫 몽골제국출신 왕비)가 흥왕사에 행차했다가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생깁니다. 1276년 충렬왕과 원성공주가 이 대사찰에 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려 이 금탑을 그대로 내궁에 들여놓은 것입니다.

고려사 > 권89 > 열전 권제2 > 후비(后妃) >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1276년 5월(음)
원성공주가 흥왕사의 금탑을 내궁에 옮기다
공주(公主)가 흥왕사(興王寺) 금탑(金塔)을 가져다가 내궁(內宮)에 들여놓았는데 금탑을 꾸민 장엄(裝嚴)을 홀랄대(忽剌歹, 쿠라다이)와 삼가(三哥, 셍게) 등이 많이 훔쳐갔다. 공주가 장차 금탑을 허물어 〈마음대로〉 쓰고자 하니 왕이 그만두게 하였지만 듣지 않았고 다만 눈물을 흘리며 울 뿐이었다. 뒤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흥왕사에 갔는데 승려들이 금탑을 돌려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공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公主取興王寺黃金塔入內, 其裝嚴多爲忽刺歹·三哥等所竊. 公主將毁用之, 王禁之不得, 但涕泣而已. 後王與公主如興王寺, 僧乞還金塔公主不許.

내궁으로 옮겼다라고 되어 있으니 마치 궁의 실내에 옮긴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원문을 보면 "黃金塔入內 황금탑을 안으로 옮기다."라고 되어 있어 '궁궐'내 즉 궁궐내(실내가 아닌)로 옮겼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을 어떻게 옮길 수 있었나싶겠지만 사실 건물을 그대로 옮기는 일은 우리의 전근대에도 심심찮게 있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다음 부분을 보면 이 황금탑이 굉장히 화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니 이 부분.
其裝嚴多爲忽刺歹·三哥等所竊. 
금탑을 꾸민 장엄(裝嚴)을 홀랄대(忽剌歹, 쿠라다이)와 삼가(三哥, 셍게) 등이 많이 훔쳐갔다. 

화려한 미학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에서도 최대거찰의 황금탑이었으니 만큼 많은 보물급 장신구로 치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흥왕사의 승려들이 금탑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공주는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인 1277년 그녀는 결국 다시 끈질기게 간청한 승려들의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금탑을 흥왕사로 다시 복귀시킵니다.

고려사절요
고려사절요 제19권 / 충렬왕 1(忠烈王一)

정축 3년(1277), 송 경염 2년ㆍ원 지원 14년

○ 관후서(觀候署)에서 아뢰기를, ..... 또 아뢰기를, “무엇이든 기원하여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신등이 어찌 진심을 다하지 아니하겠습니까마는, 오직 궁중에 있는 흥왕사(興王寺)의 금탑(金塔)은 돌려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공주가 모두 허락하였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승지 이존비(李尊庇)를 시켜 금탑을 흥왕사로 돌려 보냈다. 과거에 공주가 흥왕사의 금탑을 취하여 궁중으로 가져오고 이것을 허물려고 하므로 왕이 못하게 하였는데, 듣지 않자 다만 눈물만 흘렸었다.

고려사 기록에도 등장하는 이 Return의 이유는 당시 충렬왕의 병세를 낫게 하기 위해 승려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사 > 권89 > 열전 권제2 > 후비(后妃) >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 
원성공주가 충렬왕의 질병 치료를 위해 흥왕사의 금탑을 돌려주다

왕의 병이 갈수록 더하자 재추(宰樞)들이 〈원성〉공주(公主)에게 영선(營繕, 건축물등을 짓는 행위)을 멈추고 매와 새매를 풀어 주라고 요청하였다. 또 요청하여 말하기를, “무릇 재액(災厄)을 물리치자면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흥왕사(興王寺)의 금탑(金塔)이 아직 궁중에 있다 하니 바라건대 돌려주소서.”라고 하자 공주가 모두 허락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승지(承旨) 이존비(李尊庇)에게 명하여 탑을 흥왕사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원성공주(제국대장공주)는 사실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느낌이 있는데 언젠가 소개할 새 궁궐의 신축공사 역시 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스레 진행하려 했던 기록이 남아 있지요. 그녀는 그 후에도 종종 이 금탑을 보러 가니 1285년의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1285년 12월 19일(음) 병진(丙辰) , 
왕과 공주가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금탑(金塔)에 배례한 후 묘련사(妙蓮寺)에 행차하였다.
이상한 기록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치 황금탑을 흥왕사로 돌려준 날, 우연히 한 문인이 시를 지은 것처럼 보이는 시가 있지요.


목은시고 제4권 / 시(詩)

마니산 기행(摩尼山紀行)

새벽에 흥왕사(興王寺)에 들렀는데, 이날 금탑(金塔)을 옮기었다.


보탑품을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 流觀寶塔品

금선의 노래를 낭랑히 읊어라 / 朗詠金仙歌


달린 데 없이 본디 허공에 떴는데 / 浮空本無蔕

한을 하직하며 눈물 줄줄 흘렸다네 / 辭漢淚如波


이 두 가지가 다 허탄하기만 하니 / 兩途俱幻誕

사람에게 깊은 탄식을 일으키누나 / 令人發深嗟

중략.


그런데 이 시는 [목은시고]에 실려 있습니다. 바로 목은 이색선생이 지은 시이지요. 그런데 그의 생몰년대는 전혀 흥왕사의 금탑이전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이색(李穡) 1328年(高麗 忠肅王15)~1396년)은 14세기의 인물이니까요.


그럼 이 탑은 14세기에 다시 한번 이전한 것일까요?


또한 좀 더 후대에는 흥왕사에 '2기의 13층 금탑이 쌍둥이처럼'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바로 최우(崔瑀, 1166~ 1249년)의 기록때문입니다.

고려사(高麗史) 〈최이전(崔怡傳)〉
고려(高麗)의 최우(崔瑀)가 황참(隍塹)과 나성(羅城)을 수리하였는데, 가병(家兵)을 역도(役徒)로 삼고, 그의 집 은병(銀甁) 3백여 개와 곡식 2천여 석을 내어서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또 황금탑(黃金塔) 13층과 화병(花甁) 각 한 개씩을 만들어 흥왕사(興王寺)에 두게 하였는데, 모두 무게가 2백 근이었다.

여기보면 12~13세기 인물인 최우가 200근짜리 13층 금탑을 흥왕사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지요. 이 시기에는 이미 11세기에 지은 흥왕사 금탑이 존재하고 있을 시기입니다. 따라서 2기의 13층 황금탑이 흥왕사에 공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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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고려 13층 금탑

같은 11세기초인 1089년, 또다른 금탑이 세워지니 바로 고려정궁 (가칭) 만월대의 정전 건축물인 '회경전'에 위치한 금탑입니다.

동사강목 제7하 
기사년 선종 6년(송 철종 원우 4, 요 도종 대안 5, 1089)
동10월 13층 금탑(金塔)을 회경전(會慶殿)에 세웠다.
○ 태후(太后)가 국청사(國淸寺)를 지었다.

여기 등장하는 태후는 바로 고려선종의 왕후였던 인예왕후입니다. 

이 기록과 연관된 흥미로운 정보가 중국서적인 [문헌통고]에 등장하니, 원우 4년 (즉 1089년)에 국모가 두개의 금탑을 가지고 가서 양궁(兩宮)이란 자의 복을 빌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원우(元祐) 4년에 고려의 왕자 의천(義天)이 중[僧] 수개(壽介)를 시켜 항주(杭州)에 이르러서 죽은 승려들을 제사하게 하고 말하기를 ‘국모(國母)가 두 개의 금탑을 가지고 가서 양궁(兩宮)의 수(壽)를 빌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주(知州) 소식(蘇軾)이 이를 물리쳤다.”

이는 당시 국모가 '두개의 금탑'의 모형을 가지고 가라고 명했다는 느낌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1089년에는 쌍둥이처럼 회경전의 13층금탑과 같은 개성에 위치했던 왕궁의 대표사찰 흥왕사의 13층 금탑이 동시에 지어지고 존재한 시기이기도 하지요. 
고려정궁 정전 회경전 

회경전의 황금탑에 대해서는 더 후대의 기록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금탑을 세운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1 /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

순종(順宗) 원년(1083)에 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고, 선종(宣宗) 1년(갑자)에 비로소 승과(僧科)를 설치하였으며, 2년(을축)에는 백좌 도량을 내전에 설치한 다음 비로소 대가(大駕) 앞에서 불경을 받들고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4년(정묘)에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두어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였고, 6년(기사)에는 13층(層) 금탑(金塔)을 내전에 세우고 아울러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다.

탑을 세우고 경찬회(慶讚會)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설치'한 게 아니라 '행했단' 것이 맞을 것입니다. 경찬회는 대규모 건축물을 지은 뒤 성대하게 축하하는 행사를 말합니다. 이 행사는 불교가 탄압받기 시작한 조선중기이후 자취를 감춥니다.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다지만, 다른 오랜 종교 역사를 가진 국가들에 비해 우리에겐 조선중기 이전까지 엄청난 유산을 남겼을 불교문화재가 상대적으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이런 기록을 통해 그런 안타까움을 반복해서 느낄 뿐입니다.



덧글

  • 못되먹은 얼음집 2020/08/24 02:52 #

    8년전 중학생때 들은거긴 했는데 인도의 사원 사진을 감안하면 화려했을거 같네요. 지금도 있었으면 외국인들에게 한국 이미지로 각인되었을텐데 안타깝네요. 어디선 이걸 태종이 불교 억압할겸 가지고 가고 싶어하던 명사신에게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만약 중국에 있었어도 명말청조 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혼란으로 인해 이미 없을거 같네요...ㅜㅜ
  • 역사관심 2020/08/31 23:35 #

    동감입니다. 그래도 한 기 정도만 남아있었더라도 우리 미학을 다시 쓸수 있는 문화재들이 너무 처절할 정도로 소멸되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 응가 2020/08/31 21:25 #

    법궁의 정전이 단층이었는데 사찰이 금은칠을 하다니 고려시대 불교가 대단하긴 하군요. 어쩌면 조선초 불교탄압이 오죽했겠나 싶습니다.
  • 역사관심 2020/08/31 23:34 #

    바로 그렇습니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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