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2층집들은 모두 일본집일까? (가제) 한국의 사라진 건축

이 글은 제가 가장 오래 묵혀두고 조사한 (근 6~7년) 글입니다. 그래서 읽어주시는 분들이 조금 귀찮으시더라도 천천히 내용을 끝까지 들여다봐주시면 하는 욕심이 듭니다.

우리에겐 여러 문화적 고정관념이 있는데 아마도 그중하나가 20세기초에 지어진, 즉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지어진 2층집은 모두 일본식 가옥 (일명, 적산가옥)일 것이다라는 것일 겁니다.

즉, 군산시에 여행가면 패키지로 돌아 볼수 있는 일본인들이 살던 살림집을 떠올리곤 하지요.
군산시 시흥동 히로쓰가옥

그래서 불행하게도 당시 모든 2층이상 가옥은 일식아니면 양식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적산가옥도 그 역사성을 중시해 보존해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적산가옥보다 보기 힘든 '조선식 2층집'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사실을 대중은 망각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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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이후에나 연구대상이 되기 시작한 구한말 조선식 2층가옥들

우선 2007년의 연구논문중 중요부분을 조금 소개합니다.

2007년 서동제 외.
18세기부터 개성 등에서 일부 상점과 주택에 다락을 두는 간이 2층 형식이 존재하였으며, 20세기 초에는 본격적인 2층 상가와 주택이 출현하였다. 중이층(重二層) 한옥 역시 이 시기에 출현하게 되었고, 이는 단층의 전통한옥이 2층 이상의 건축양식으로 발전하는 과정 중에 생겨난 새로운 양식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도입부부터 일본식 가옥을 다룬 논문들과 달리 '전통한옥이 2층이상으로 발전'한 양식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양식상의 상세한 부분을 조금더 소개하자면.

이 시기에 지어진 절충식의 건물의 대표적인 특징은 한식목조 2층 가옥으로써 지붕은 조선기와를 잇고, 측면 벽은 벽돌로 쌓아서 막거나 전면이라도 기둥과 기둥사이에 벽돌을 쌓기도 하였다. 창문은 한식유리창을 기본으로 하고 장식은 주로 완자형 이었지만, 서구식 여닫이 창 또는 오르내리창으로 만든 사례도 있었다. 세부적으로 처마는 짧게 내밀고 부연을 달았으며, 처마 밑은 소로수장으로 하되 이층에는 난간을 두고 위에는 낙양으로 장식하였다. 난간은 2층에서 내밀어 꾸미기도 하였으며 서양식 난간동자를 쓰기도 하였다. 때로는 볕을 가리고 통풍이 되는 비늘창을 덧문으로 달기도 하였다. 2층 건물의 상층부분에는 전통 누각의 수법을 가미하여 발코니처럼 보이게 하거나 내달아 꾸밈으로써 서양의 의장을 도입하면서도 한옥의 장식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절충식 건축이 계속해서 건설됨으로 써 당시 한국의 전통적 도시 및 건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주거건축의 변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면, 그동안 단층으로 일관해 오던 전통한옥이 2층 규모로 변환하게 되는 직․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층한옥 (즉 살림집)과 당시까지 존재한 2층 한옥상점 건물과의 차이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화 과정 중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성격을 띤 이층한옥의 건축적 특성에 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본 연구에서 조사된 이층한옥에는 기본적으로 전통한 옥의「대청↔방」이라는 동선이 유지되면서,「방(또는 거실)↔계단↔ 2층」이라는 새로운 수직적 동선이 부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2층 한옥상가와 공간․형태적인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층 지붕공간이 2층 바닥에 중첩된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1층 지붕공간은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퇴간의 천정높이를 확장하거나, 수장 및 피난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계단의 위치에 초점을 두고 2층공간의 성격을 고찰하면, 2층 한옥상가보다 과도기적 성격을 띤 이층한옥이 외부의 동선에 대해서 폐쇄적인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붕 및 처마형태는 전통한옥보다 기본적으로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지붕재료 또한 지붕하중을 고려하여 경량의 함석 또는 슬레이트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통한옥에서 보이는 지붕앙곡과 귀솟음 기법 등은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외관에서는 새로운 재료인 유리가 다수 사용되었다.

구조적 특성으로, 과도기적 성격을 띤 이층한옥의 지붕구조는 전통한옥의 5량 구조를 기본으로, 1층-5량, 2층-3량의 구조형식으로 발전되었다. 또한, 전통한옥의 구조부재 간략화과정에서 보이는 도리 밑 수장, 굴도리, 쪽소로 등이 나타나지 않으며, 대신 구조적 보강을 위해 보를 받치는 보아지와 2중 장혀를 사용하고 있는 점은 동시대의 가옥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과도기적 성격을 띤 이층한옥만이 가지는 특징으로 전통적인 구조부재 결구방식이 근대기에도 의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다양한 수장공간의 발달, 겹집화 그리고 서까래의 간략화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전래한옥과는 다른 변화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과도기적 성격을 띤 이층한옥은 공간적으로 전통한옥이 수직방향으로 확장하여 중층의 주거공간으로 발전했던 주거양식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목가구법과 근대적 건축자재가 복합된 형태의 양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도기적 성격을 띤 이층한옥은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우리의 주체적 주거건축양식의 한 종류로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가 지은 적산가옥과는 결을 달리하는 느낌이 확 오지요. 최근 들어 언론에 소개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어 익숙한 감이 있는 적산가옥과 달리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2층 '한옥''. 

그럼 이런 건물들은 지금도 남아 있을까요?


위의 연구로부터 3년후인 2010년 현전하는 구한말 중층한옥을 분석한 논문이 있습니다.

 

2010년 이호열, 김지운

그동안 우리나라 중층 목조건축에 관한 연구는 목탑을 중심으로 진행이 되어 왔으며,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기 이후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건축되었던 목조 이층한옥에 대해서는 아직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2000년이후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되긴 했으나 전반적인 조사가이루어지지 않아 이층한옥의 건축특성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다.

 

……

새로 유입된 건축재료와 기술은 내외공간의 구성과 이용방식, 입면 등에 변화를 가져왔으며4), 이로 인해 전통한옥의 공간구성과 건축형식을 따르면서 거기에 일식과 양식주택의 장점을 부분적으로 수용절충한 형태의 근대한옥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많이 건축되었다. 5)이중에서도 구조면의 특징적인 변화는 단층위주의 전통한옥에서 탈피하여 주택에 중층구조를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주거용 건물의 중층구조는 조선시대 궁궐의 침루를 비롯 사대부가의 다락 등에서 사용되었다. 민간 주택의 중층목조건축은 일제강점기 이후 등장했다.


우선 중요한 부분은 필자가 예전부터 소개한 '침루'(조선전기까지 존재한 궁중/귀족/양반층 2층 침소)의 소개와 함께 중층살림집이 조선초기까지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는데 반해, 이 시기 (구한말)이 되면 민간의 중층건물이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런 집들을 한번 간략하게 볼까요. 경남 창녕의 이방면 자택부터 봅시다.

창녕 이방면 이층한옥


벌써 앞서 사진에 나온 일본식 가옥과는 다르죠. 흥미로운 점은 외양만 다른게 아니라, 온돌을 1층에 깔고 2층은 남는 공간으로 쓰는 등 구조와 용도도 완전히 일식가옥과 다른 점입니다.


1층 바닥은 온돌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과 건넌방에 면한 측퇴에는 장마루, 전퇴 의 툇마루에는 우물마루가 각각 놓여있다. 2층의 각 실의 용도는 자세히 알수 없으며, 소유자 성준경(63) 유년시절 2층을 서재 겸 공부방으로 사용을 했다고 말한다. 난방이 되지 않는 2층은 주로 여름철 거주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난방이 요구되는 겨울철에는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수장공간 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 , 습한 1층을 거실이나 손님용 접대실로 쓰고, 2층을 다다미를 깐 침실로 이용하는 일식건축과는 반대.

 

이런 차이는 전형적인 적산가옥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건물은 군산시 신흥동 적산가옥으로 일반적으로 일본의 주거는 2층으로 구성될 경우, 1층에는 살림공간, 2층에는 거실과 침실공간이 배치됩니다.

군산시 신흥동 적산가옥

논문을 좀 더 살펴보면 한옥의 결구를 그대로 쓴 부분이 많음을 분석결과 알 수 있습니다.


창녕 이방면 이층한옥의 층도리(260×150mm)는 층보(150×150mm)보다 약간 크게 만들었으며, 층도리와 층보는 결구되어 2층 마루바닥을 형성하는 귀틀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귀서까래의 구성수법을 보면 1층은 선자연이고, 2층은 말굽서까래로 되어 있다. 창녕 이방면의 이층한옥은 전통한옥의 구조 수법을 충실히 따르면서 상층에 장마루바닥으로 된 실을 배설한 형태로 간소한 과도기 이층한옥의 구조형식을 잘 보여준다.


다음 건물로 가보지요.

경남 산청군 금서면 민재호 가옥

근대한옥으로 등록문화재148호인 경남 산청군 민재호 가옥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 군수를 지낸 민재호(閔再鎬)가 지은 건물입니다. 1930년에 건축된 건물로 현 집주인의 설명에 따르면  주변 민씨 가옥의 여름 별채로 원래 지어진 것으로 후에 현재 집주인에게 양도 되었다고 합니다.

논문을 보면 "1층은 방을 앞뒤 2열로 구성한 겹집형 평면으로, 왼쪽부터 부엌, 안방, 윗방, 대청, 건넌방, 함실 아궁이로 실이 구성되어 있으며, 2층은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바닥 위에 평상을 두고 그 위에 널을 깔아 침실로 활용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2층을 침실로 활용했다고 되어 있어 앞서 소개한 창녕 한옥과는 다른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죠. 안방, 윗방, 건넌방등 1층에 모두 방이 배치되어 있고, 2층은 '여름철에 더울때 시원하게 쓰는 곳'일 뿐입니다. 역시 일식 가옥과는 다릅니다. 

아래는 논문(2010)에서 소개하고 있는 구한말-일제시대 2층 한옥의 여러 전통지붕 양식과 지붕재료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거의 전부 전통적 팔작지붕이나 한식기와를 쓰고 있습니다.

아래는 특히 인상적인 2층 살림집들로 이 집들은 마치 조선시대 2층궁궐 건축물인 덕수궁의 석어당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지요. 적산가옥의 느낌이라곤 찾아보기 힘듭니다.
 보령 이주성 이층한옥 (1936) & 청양 정갑희 이층한옥 (1935)

같은 시기 벽돌로 지은 중층건축들도 등장하니 덕성여대 30년대식 건축물인 덕우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역시 지붕 형식이 전형적인 한옥이지요.
그리고 비슷한 시기 건물들 중에서는 일식 중층과 한식 중층이 혼합된 형태도 등장하니 남일당 한약방 건물이 대표적입니다.
구 남일당 한약방 1923년 건립 (강경읍)

이 건물은 얼핏보면 적산가옥이지만 그 구조가 한식입니다. 적산가옥스러운 이유는 1층의 차양, 지붕장식재, 변화된 툇마루등때문입니다.

건립당시의 남일당

지금까지는 21세기의 학자들이 '분석'한 결과물을 봤습니다. 그럼 과연 2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지어진) 이런 건물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살아가던 당시에는 어떤 시각으로 이 집들을 바라보았을까요? 

어찌보면 지금의 연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당대의 시각'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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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당시 '조선식 2층집'과 '일식 2층집'의 구분 기록

지금부터 소개하는 부분은 필자가 파악하는 한 아직 어떤 역사건축학계 학자도 언급하지 않은 정보입니다. 다음은 1924년 동아일보의 기사.

1924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

가독성 좋게 보여드리겠습니다.
1924-11-26 조선식이층가옥조사

이 기사 제목은 "조선식은 1만4천여동: 삼층집은 68채". 내용을 볼까요? 

조선식가옥이 2층집은 1,392채 (단층까지 합하면 14,742채). 나머지는 돌집, 벽돌집, 그리고 '일본집'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즉, 이 당시 언론에서는 '조선식 2층집'을 '일본집'과 엄연히 구분하고 있었음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기자만 그렇게 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다음의 기사를 보지요. 

"공덕리화재"라는 제목의 이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1926년 2월 26일 큰 화재가 났는데 '이층집 전소'라는 부제에 보이듯 큰 불로 집이 다 타버리는 사건이 납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런 정보가 등장하지요.

"공덕리 잡화상 이경현씨 집에서 불이 일어나 '조선집 이층제 아홉칸'을 전소하고"...  여기서도 분명히 '조선집 이층'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또 다른 화재가 발생하니 이번엔 태평통(현 세종로)이란 거리에서 큰 화재가 납니다.
태평통에서 불이 났는데 고물상에서 불이 나서 계속 번집니다. 그런데 후반부를 보면 "...윤낙중, 강기호 집을 반을 태우고 조선식 이층집 2채를 반이상 태우고 진화했다..."라는 내용이 또 등장하지요. 흥미롭게도 이 집의 사진도 위에 등장합니다.


그럼 일본 2층집 (적산가옥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다음을 보시지요.

1921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중간에 보면 '일본제로 지은 이층집 한채를 태우며 불길은..."이란 표현이 나오지요. 이렇게 조선식과 일본식 가옥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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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10여년후인 1935년 잡지의 특집기사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잡지는 1929년부터 발행된 [삼천리].

삼천리 제7권 제1호  
발행일 1935년 01월01일  

削髮爲僧한 童貞女尼數十人이 叅禪, 修道하는 서울 安國洞의 男性禁制, 安洞女僧房
서울 安洞 륙거리 別宮 담장을 끼고 녜전 보성전문학교 잇든 편 큰 길을 향하야 三淸洞을 바라서 한참 올나 가다 가 槿花女學院 엽길로 꾸부러저 또 昌德宮잇는 편길을 조곰 가노라면 꿈에 보든 亞剌比亞의 궁궐가튼 丹靑 칠한 순조선식 이층집이 하나 나진다. 하얀 회ㅅ벽에 기름발이 잘간 윤나는 노란 네모기둥에, 놉흔 용마루에 구름밧게 께끗하게 올니 소슨 이층 이 집.

길이 총총한 夕陽過客은 「허 잘 지엇꾼 녯날 정승집 갓군!」하고 그저 무심히 지날는지 모르되 또 道가 놉흔 西山大師가튼 이는 막대 끗을 드러 이 집 청기와짱 우으로 흐르는 白雲을 가르치며 「영화는 덧업느니라.」하고 지날는지 모르되 그러나 서울 한복판에 이런 집이 잇슴을 본 「삼천리」 긔자만은 심심히 지나지 못하여 나는 덩실 놉흔 그 쌍바라지 대문 압헤 서서 이 집 현판을 치어다 보앗다. 거기에는 「佛敎女子禪學院」이란 墨㾗玲瓏한 一幅의 간판이 걸니어 잇다. "불교여자선학원"

현대어로 주요내용을 보면 "서울 육거리 궁궐 담자을 끼고 예전 보성전문학교 있던 큰 길을 향해 삼청동을 바라보고 한참 올라가다...가노라면 꿈에 보던 궁궐같은 단청을 칠한 순조선식 이층집이 하나 등장한다."

'순 조선식 이층집'이란 글자가 선명하지요. 일식 2층가옥과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음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 곳은 내용에도 나오듯 바로 "불교 여자선학원"입니다. 이곳의 사진은 못구했지만, 비슷한 시기 (1925년)에 동아일보에 소개된 '반도학원'이란 건물의 사진을 구했습니다.
반도학원 (창덕궁옆)- 1925-3-30 (동아일보)- 1923년개관

이와 같이 기록으로 조선식, 일본식 중층가옥과 건물들을 우리 선조들은 명확히 구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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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건축가들은 어떤 의식으로 신한옥 (중층포함)을 지었을까

이제 현전하는 한옥중층건물에 대한 연구와 당대 언론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중요한 피스가 남았습니다. 당시 이런 건물들을 지었던 건축가들의 기록입니다.

우선 최근 기사인 정태도와 전종우(2016)의 글중 관련내용을 살펴보지요.

신한옥이 나아갈 길
Future of Hanok (건축, 60 (8), 2016년 8월호)
이처럼 한옥이라 불리는 범위는 매우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일반 대중들의 기와 얹은 살림집으로 1920~30년대 이후 근래까지 많은 사람들이 큰 불편 없이 살아왔고 또 살고 싶어 하는 그런 한옥을 모두 포함하여 전통한옥의 상대말로 ‘신한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정책용어 신한옥이 현대화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신한옥의 태동
한옥(기와집)은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신분의 제약이 있어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주로 양반들의 살림집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당시에는 주로 목수가 집주인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1:1주문생산)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난 1920년대부터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거주하던 대규모 필지를 소규모로 분할하여 수십 호를 한꺼번에 지어 보급(대량생산)하려는 주택업자들에 의해 서울과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한옥들이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에 지어졌던 일본식이나 한국인 건축가들에 의한 개량된 주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한옥이 대표적 주거유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마도 민족적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건축비가 다른 목조주택이나 벽돌조주택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였고 무엇보다도 ‘양반집’이라는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신한옥’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당시의 한옥 집단거주지역이 북촌한옥마을이 나 전주한옥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그 명맥을 이어와 이제는 지역의 문화정체성을 보여주는 어엿한 건축명소가 되었다.

기사를 보면 중요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20세기초 지어진 한옥들 (*북촌한옥마을 포함)에 대한 건축동기가 그것입니다. 바로 '양반집'에 살고자 했던 서민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신한옥' (즉 조선시대의 전통한옥과 다른)을 개발해서 집장사들 (즉 건축업자들)이 대량으로 건설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곳이 지금의 북촌한옥마을이나 전주한옥마을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전주한옥마을' 한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여기서 이 '당대의 건축업자'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다음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김경민, 2017)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35쪽
최근에 이르러 그들은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길 시일이 가까워지매 대경성의 미관을 위한다는 이유로 종로 일대의 큰 거리를 개수하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종로통 도로개수에 따라, 양쪽의 조선인 상점과 가옥들이 간혹 도로의 폭을 넓힘으로 인하여 헐리어 버리는 곳이 십수개 소나 되는... 헐린 집터에는 도시미관을 위하여 단층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우도록 하였다. 경제력이 부실한 조선사람이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울만한 자력이 있을지가... 일본인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인을 감언이설로 충동하여 전부 지가의 수중에 넣고자 암중비약을 한다. (조선일보, 1925. 6. 18)

1925년 조선일보의 기록으로 단층집대신 도시미관을 위해 2층집이상을 반드시 짓도록 한 총독부명령으로 종로쪽 집들은 재력이 부족한 조선인들 대신 일본 자본이 들어서게 됩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북촌을 사수하려는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비장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종로통 삼정목 구십번지 길진옥 씨는 "물론 우리의 재력이 어찌 넉넉할 수가 있겠습니까만은, 기어코 이 지역만큼은 일본인의 수중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들을 가지고 헐리게 된 열다섯 채의 소유주들중 한 사람도 집을 팔아넘긴 이가 없습니다. 그 터를 안 팔려고 기를 써가며 각 은행으로부터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얻어다가 이층집을 짓는 중인즉, 앞으로 장사가 잘되면 혹시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은행 물건이 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 아닙니까"라며 매우 전도를 우려하는 중이었다. (조선일보, 1925. 6. 18)

여기보면 일본인의 수중에 북촌을 넘기지 않으려고 단층집이 헐리는 와중에도 팔지 않고 (15채나 되는 소유주가 모두) 기를 써서 은행에서 빚을 져서 2층집을 짓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물론 이 중 일식으로 지은 이도 있겠지만, 과연 조선식으로 2층집을 지은이가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을까요?

다음으로 내용중 20년대 당시 대표적인 조선의 건축사와 업자들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44쪽
조선계 건설업체 또는 디벨로퍼들은 관급공사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민간 주택 건설 및 개발 시장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당시 주택은 크게 세 유형이 있었다. 일본식 주택과 더불어 문화주택이라 불리는 서양식 주택이 있었고, 그리고 조선식 주택 (한옥)이 있었다. 조선식 주택(한옥)은 다른 주택 유형에 비해 건축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었고 건설기술자들의 노임도 상대적으로 신식주택 건설에 비해 낮았다. 따라서 조선계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활동 가능한 영역은 한옥건설 및 개발이었을것으로 추론되며, 실제로 이들이 1920년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다.

건영사- 정세권
공영사- 김동수
마공무소- 마종유
오공무소- 오영섭
조선공영주식회사- 이민구
김종량, 정희찬

일본식, 서양식, 조선식 주택들로 3분화되어 있던 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공정방식이 조선식이었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당시 상대적으로 작은 회사들인 조선회사들은 조선식 주택을 주로 짓게 되었을 것이란 추정입니다.

그런데 이 정황을 단지 경제적추정논리뿐 아니라 당시 한 건설업자의 '철학'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증언이 나오니 다음의 부분입니다.

181쪽
막내딸 (정세권의) 정남식의 기억이다.
"어느날 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총독부가 불러서 들어갔더니 '나 보고 왜 한옥만을 건설하느냐?'고 묻더구나. 우선 무시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여파인지는 모르나, 총독부가 지속적으로 아버지에게 일식주택을 건설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면서,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주택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으셨어요".

이는 책의 주인공인 건축왕 정세권 (건영사 대표)의 말년기록입니다. 즉 나름 풀어놓고 저택종류까지는 간섭하지 않던 일제가 40년대가 되자 강압적으로 '일식건물'을 지으라고 강권했고, 이에 정세권씨가 "일본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라고 하고 40~45년까지 아예 집을 짓지 않았다는 증언을 딸인 정남식씨가 하고 있지요.

이 책에서 정세권씨가 조선식 2층집을 지었다는 내용은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당대의 조선 건축업자들이 어떤 철학으로 집을 지었는지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이가 1924년 기사에 나오는 1300채 이상의 '조선식 2층집'을 지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런 철학을 가지고 지었던 '조선식 2층집'을 깡그리 잊고 적산가옥화시켜서 그냥 다 무너뜨리거나 손가락질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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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정하는 당대 조선식 2층건물 사진들

다음은 필자가 여러 매체에서 찾아낸 (위에 소개한 건물들 이외)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조선식 중층건물들입니다. 살림집이 아닌 상가나 학원등도 많습니다.

서울 주단포목전

평양 추정- 정확한 위치불명
평양 시가지- 조선식 2층 한옥 (왼쪽)

숭례문 외곽- 아래에 2층건물 확대사진 (응가님제보)

확대사진




정확한 위치불명 (전형적인 조선 솟을대문 구조)


최경식 양화점 (1922.3.7 동아일보 광고란)


US_Army_in_Korea_under_Japanese_Rule (1945년 사진, 오른쪽 건물)


구한말 평양 2층집


구한말 숭실전문학교 전도관 (1920~30년대 추정)


평양 (1890년 3월)-Herbert Ponting (1870–1935년)이 찍은 평양시장 중 2층건물 (명백히 조선식)

일제시대 강릉읍내 (맨 앞쪽 건물)

황해도 황주 겸이포 본정통 (오른쪽 앞건물- 뒷건물은 적산가옥 추정)

신행상회지점 ( 종로 2정목 5. 지금 종로타워 자리추정, *무애자님 제보)


종로 3정목 동양루(東洋樓). 현 피카디리극장
동양루 확대


위치불명 (앞쪽 상점건물)

폭격으로 인한 전소에서 살아남은 서울의 조선식 2층집 (1952년, 백두 잊혀진 역사여행님 제보)
확대사진 (2채로 혹은 ㄱ자로 보임)
한국전쟁 당시 미국폭격 사진 (1950년 황해남도 은천군 학천. 오른쪽 위 이층건축)
확대사진

평양대성학교(안창호설립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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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feat. 답답하고 한심한 전주한옥 마을 최근 정책)

2014년 중앙선데이 7월자 기획기사 (한옥)을 보면 이제서야 다층한옥에 대해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이자는 주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사에도 조선전기의 침루라든가 오늘 소개한 구한말 우리의 건축 역사에 한 부분으로 엄연히 자리매김해야 할 조선식 중층한옥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습니다. 그저 중층한옥은 완전히 '새로운' 물건으로 치부할 뿐...(즉, 우리에겐 없던 새로운 양식이지만 포용하자는 식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놀라운 정책도 나오곤 합니다. 다음은 21012년 연합뉴스 기사입니다.

<전주한옥마을 '2층 한옥' 정체성 논란>
"지나친 상업화"…내년부터 신축 규제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앞으로 전주 한옥마을에서 2층 한옥을 새로 짓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주시는 한옥마을의 정체성 논란을 불러온 2층 한옥과 변형된 한옥 건축을 규제하는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한다고 12일 밝혔다. 전주시는 2층 한옥이 고유의 전통한옥이 아닌데다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건축 규제에 나섰다. 중략.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교동 일대 29만6천330㎡에 자리 잡은 전주 한옥마을은 1930년대부터 조성돼 한옥 540여채에 2천2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면서 도심 속 테마마을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2005년 이후 한옥마을 활성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한 해 400여만명이 다녀가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관광객이 몰리면서 상업시설이 급증하고 한옥의 전통성을 훼손하는 2층 한옥까지 등장했다.

현재 전주 한옥마을에는 6채의 2층 한옥이 있으며 모두 찻집 등 상업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사업소 김기평 소장은 "한옥마을의 정체성 확보와 보존을 위해 2층 한옥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며 "주민설명회와 공청회를 거쳐 내년 상반기에 한옥마을의 한옥 층수를 1층으로 제한하는 지구단위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자, 여기보면 우선 2층 한옥은 고유의 전통한옥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제 글로 대변하겠습니다 (고려~조선중기까지 등장하는 수많은 중층한옥 기록). 그리고 오늘 이 글과 관련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주 한옥마을은 1930년대부터 조성돼..."라고 되어 있지요?

앞서 제가 전주한옥마을을 기억하란 의미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전주한옥마을은 조선후기부터 이어져 오던 단층식 조선후기 전통한옥마을이 아닙니다. 바로 위에 소개한 대량으로 건축업자들에 의해 지어진 20~30년대의 '신한옥'마을이지요.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당대에는 수천채의 '조선식 2층한옥'이 버젓히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되어 있죠. "변질된 한옥"이라구요? "정체성 확보"라구요? 1년뒤인 2013년 이 논란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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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2층 한옥 규제 논란
[333호] 2013년 01월 24일 (목) 17:13:39 정희진 기자 
900여 채에 달하는 한옥마을이 조성돼 있는 전주 한옥마을이 한옥에 대한 정체성 논란에 빠졌다. 그 이유는 전주시가 상업화된 ‘2층 한옥’을 변형된 한옥 건축물로 규제에 나섰기 때문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2005년 이후 한옥마을 활성화 정책이 추진돼 한해 약 400여만 명이 다녀가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6채의 2층 한옥이 있는데 관광객이 몰리면서 모두 찻집 등 상업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주시는 한옥마을의 정체성 논란을 불러온 2층 한옥과 변형된 한옥 건축을 규제하는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해 파장이 예상된다. 

전주한옥마을사업소 김기평 소장은 “한옥마을의 정체성 확보와 보존을 위해 2층 한옥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주민설명회와 공청회를 거쳐 내년 상반기에 한옥마을의 한옥 층수를 1층으로 제한하는 지구단위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스튜가 최원철 대표는 “상업적인 이미지로 2층 한옥을 규제하는 것을 옳지 않다. 2층 한옥은 예전부터 존재해왔고, 전통방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한옥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옥을 많이 보급하기 위한 땅의 효율성 부분에서는 2층 한옥은 당연히 필요하다. 다만 2층으로 지을 때의 한옥의 모습을 살리기 어렵기 때문에 디자인 측면에서 심사 등을 통해 한옥의 본모습은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2층 한옥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전주시는 단순히 상업적인 측면을 내세워 2층 한옥을 규제하기 보다는 정확한 명분을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원철 대표란 분이 옳은 말씀을 하셨네요. 하지만, 오늘 소개해 드린 이런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반박하셨으면 더 효과적이 아니었을까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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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예정대로 '2층 금지'
2013.10.24
 
시, 건축 규제안 공개·내달 심의
‘한옥 8m·담장 1.8m’ 높이 제한
일부주민 “공공시설과 차별하나”

전북 전주시가 한옥마을에 2층 한옥을 제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한옥마을 지구단위계획 변경안을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전주시는 한옥마을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상업기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단위계획 변경안을 마련했다. 변경안 내용은 한옥 층수를 1층 이하(높이 8m)로 제한하고, 담장 높이는 1.2~1.8m로 하한선을 정했다. 또 한옥을 새로 지을 때 지하층을 금지하고, 담장·대문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추진한 이 작업은 주민공청회 등을 열었고, 다음달 5일 열리는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중략. 
 
그러나 일부 한옥마을 주민들은 “시가 합리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구단위계획 변경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옥마을 안 어진박물관과 강암서예관 등 공공시설은 지하와 2층 건축을 허용하면서도 개인 건물은 1층만으로 규제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상업시설이 활성화하지 못하면 한옥마을은 단순 관광지로 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 동감입니다. 백번) 중략.
박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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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제대로 모르면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리고 필자가 예전에 소개한 '도깨비 뿔' 담론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이데올로기성' 담론이라 감히 생각합니다. 즉, '중층한옥'은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적산가옥'을 본딴 일식이니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이야기를 아마 하고 싶은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규제하려면 명확한 철학을 가지고 하시던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조선후기식 한옥마을이라는 것을 프렌차이즈로 삼던가. 누군가 이 글을 전주시 홈페이지에 소개라도 해주시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멋드러진 기존의 전주한옥마을 2층상점건물

과연 이런 건물과 이런 정책을 보시면서 전주한옥마을이 세워지던 30년대 일제의 일식건물요구를 뿌리치고 신한옥들을 지으시던 고 정세권 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핑백

  • 까마구둥지 : 한국전쟁 당시 평양 한옥이 사라지는 모습 2020-09-06 06:26:33 #

    ... 로 초가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좀 더 클로즈업해보면 얼마전 다룬 주제와 또 연결되는 건물이 보입니다.네 바로 조선식 이층집으로 보이는 건물입니다. [일제강점기 2층집들은 과연 모두 일본집일까?]에 들어갈 만한 건축물로 보입니다. 예전 글들과 연관되는 사진들인지라 소개했습니다. ... more

덧글

  • 도연초 2020/08/23 10:07 #

    정치논리 때문에 전통을 후손들이 파괴하는군요;
  • 냥이 2020/08/24 11:26 #

    덧글을 보니 중국에서 있었던 문화대혁명이 생각납니다.
  • 역사관심 2020/08/24 22:38 #

    문화적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유연해질수록 역으로 원래 우리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소심한 돌고래 2020/08/23 14:52 #

    한숨밖에 안 나오네요. 정작 전통을 운운하면서 정작 제대로 연구는 해보지도 않았다는게 뻔합니다. 앞으로도 중층한옥이 널리 퍼지는 날은 없나봅니다.
  • 역사관심 2020/08/24 22:39 #

    사실 이쪽 연구는 본문에 나오듯이 2000년대 후반이후에야 간신히 일부 학자들이 간간히 논문을 내는 수준인지라... 20년씩 된 연구도 행정에 반영되려면 꽤나 운이 좋아야 하는 현실이라,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할 듯 합니다. 그래도 대중들이 많이 원하고 있으니 중층한옥은 계속 되겠죠.^^
  • 함부르거 2020/08/23 15:14 #

    공무원과 정치가들이 이 글을 읽어야 할텐데요.
  • 역사관심 2020/08/24 22:39 #

    네, 많이들 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말 전주시쪽에는 좀 알리면 좋겠어요.
  • 백두 잊혀진 역사여행 2020/08/25 17:29 #

    제가 예전에 찾아본 바로는,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 새마을운동 이전에 2층 한옥이 개성과 평양, 그리고 의주지역까지 존재하였다고 알아보았습니다. 특히 평양의 경우에는 상당히 다양한 양식의 2층 한옥이 존재하더군요.
    대동강 인근에는 수상가옥처럼 2층가옥이 어느정도 사진에 보이고 대동문에서 찍은 사진에서는 역사관심님의 위 내용중 사진에서 처럼 2층한옥이 자주 보입니다. 다만 평양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정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한국전쟁만 아니었더라도 옛 사진속의 모습이 많이 남았을텐데.. 아래 대동문에서 평양객사를 향해서 찍었던 사진에서도 좌측에는 2층 한옥이 보이더군요. 어쩌면 2층 한옥을 사라지게 만든것은 전쟁의 영향이 컸을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래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평양 대동문에서 평양객사로 찍은 사진의 링크입니다. (좌측에 2층 한옥이 보입니다.)

    http://namu.wiki/w/%ED%8C%8C%EC%9D%BC:%ED%8F%89%EC%96%91%20%EC%8B%9C%EB%82%B4%20%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EB%8B%B9%EC%8B%9C%20%EC%8B%9C%EA%B0%80%EC%A7%80.jpg
  • 역사관심 2020/08/24 22:43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역사여행님. 평양쪽에 한옥이 수없이 많았음은 예전에 다룬바가 있는데 정말 아쉬울 따름입니다. 분명 중층한옥도 꽤나 존재했을테구요. 평양객사 사진은 못보던 것인데 흥미롭네요. 찬찬히 들여다봐야겠습니다. =)

    말씀하신 대동강 고상가옥 글
    http://luckcrow.egloos.com/2578611

    평양의 수천채 한옥관련 글
    http://luckcrow.egloos.com/2653970

    이미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관심이 있으실까 링크글을 올립니다.
  • 백두 잊혀진 역사여행 2020/09/04 11:30 #

    혹시 평양객사 대동관에 관한 사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평양객사의 사진도 링크 올립니다.
    평양객사도 평안도 객사중에서 으뜸으로 대우해 주어서인지 상당히 웅장하게 보이더군요. (특히 개인적으로는 공포가 인상깊게 보입니다.)
    http://namu.wiki/w/%ED%8C%8C%EC%9D%BC:%ED%8F%89%EC%96%91%EA%B0%9D%EC%82%AC%20%EB%8C%80%EB%8F%99%EA%B4%80(%EC%9D%BC%EB%B3%B8%EA%B5%B0%EC%97%90%EA%B2%8C%20%EC%A0%90%EB%A0%B9%EB%8B%B9%EC%8B%9C).png
  • 역사관심 2020/08/25 21:59 #

    다포가 굉장하네요. 익공까지 보이는듯도하고... 객사가 저정도니 당시 평양답습니다. 다시 천천히 봐야겠네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역사여행님.
  • 천하귀남 2020/08/24 07:29 #

    과거의 2층 한옥은 2층의 온돌 시공 문제로 제 구실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겨울의 추위도 그렇지만 여름에 비는 시간 이용한 제습목적의 난방도 어렵다는 부분 때문입니다. 여기에 위이 내용에도 나오지만 온돌 사용 못해 보조로 쓰는 화로는 그 얼마 되지도 않는 2층 한옥을 싸그리 날려먹기 좋지요.
    다만 현대 와서는 전열이나 온수보일러 등을 이용한 난방처리가 쉬워진 편이니 이 부분 고려해 건축 기준은 완화 하는 것도 고려하긴 해야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도 또 다른 중요요소가 처마를 활용해 태양열을 제어하는 부분인데 원체 2층 한옥이 적은 한국이니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법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일본이나 중국쪽 차용한것인지 구분도 안됩니다.

    이러니 지방처럼 건물 밀도가 낮은 지역은(전주 지역은 일반 주택도 단층집 흔합니다.)어정쩡한 2층 한옥의 불허가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http://brainage.egloos.com/5823059
    이런 요상한 2층 한옥이 늘어나는 것도 조심하긴 해야 합니다. 허가내고 지어진 뒤는 늦습니다.




  • 천하귀남 2020/08/24 10:00 #

    어떻게 보면 한옥의 2층은 온돌의 도입과 함께 주거용으로는 사실상 도태된 구조라 봅니다.
    이걸 살리자고 하면 사실상 전통요소 상당수가 방해가 되고 대체하자면 현대 요소가 왕창 들어가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걸 고집해야 할지 의문입니다.
    이미 단위면적당 건축비 문제로 어느 나라나 전통건축을 살리기 어렵다는 부분도 고려해애 합니다.

  • 역사관심 2020/08/25 00:05 #

    천하귀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현재 지어지고 있는 중층한옥에 대한 문제는 말씀하신 글을 포함 (제 댓글도 보이네요 ㅎㅎ)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중층한옥을 짓고 사는게 꿈인지라 포기하기가 힘드네요 ^^; 여러 단점과 난점을 시간을 들여 해결해나간다면 사실 도심에 어울리는 형식의 한옥인지라 매력적인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이 사견입니다 (특히 조선전기까지 자주 존재하던 중층익랑등을 살려 앞으로 지어진다면 전통여관등에 살려봐도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사견이지만 통시적관점에서 결코 온돌이 모든 시대에 걸친 한옥의 절대적 정체성이라 개인적으론 생각치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아는 전통이란 개념이 거의 조선후기식에 집중된 현상자체를 개선, 우리 문화의 외연을 넓히자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현재 한국대중은 거의 모르고 있는 (그래서 적산가옥으로 뭉뚱그려 오해하고 무시하고 있는)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20세기초 2층을 여름용이나 거실로 쓰는등 우리 선조들이 2층한옥을 어떻게 활용해갔는지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좀 더 퍼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쓴 것입니다. 말씀하신 기술적인 문제나 비용적인 문제는 할 수 있는 부분은 개선해나갈 수 있는 부분은 해나가고 그래도 못푼다면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짓고 살고 싶은 사람은 분명 있다고 생각됩니다. 단점이 크면 인기가 없을 것이고 도태된다면 어쩔수 없겠지요. 다만, 이런 문제가 아니라 사실 더 큰 문제는 우리 스스로 더 풍부해질 수 있는 우리 것조차 이데올로기적으로 쳐내고 있는 문제라 사료됩니다. 그건 우리 후손들이 꼭 극복해내야할 심각한 잔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천하귀남 2020/08/25 11:06 #

    2층 한옥의 문제는 구조적으로 서양식 중목구조에 기와지붕 씌운것과 구분이 안 된다는 문제가 큽니다. 벽체와 기초 지붕가구 등이 대폭 간소화 됩니다. 한마디로 이걸 허용하면 전통한옥요소 무시한 겉만 한옥으로 짓는 경우가 엄청 늘겁니다. 건축비가 확 싸지는 데요.

    한옥 지붕의 곡선구조나 선자서까래 사용, 5량이상의 들보구조등을 무시하거나 간략화 하는 경우가 엄청 많습니다.

    한옥의 전통을 살리려면 산업적으로도 한옥 전통의 양식이 살아 이걸 만들고 유지보수하는 산업과도 연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집에만 한옥 인증을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 천하귀남 2020/08/25 11:52 #

    참고로 지금 남아있는 서울지역 한옥도 집장사 집이라 해서 외형은 한옥인데 내부는 각목과 일본식 지붕구조 채용한 집들 엄청 많습니다. 이런 집들도 현재 한옥 인정에 따른 보존가치 인정 잘 안합니다.

    뭐를 한옥으로 인정 하느냐 마느먀 하는 부분에서 생활이나 기술 발전으로 기초와, 벽체부분은 현대적인 재료나 방식을 써도 지금은 인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도 지붕가구와 기둥부분 건드리는 경우 인정 안 합니다. 이 부분이 한옥의 핵심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2층 한옥은 그 핵심을 건드리는 경우가 많아 인정받기 힘듭니다. 외형만 한옥입니다. 특히 상업건물류는 더 합니다. 이 부분은 위 사진에 올라온 일부 일제시대 한옥형 상업건물도 공통으로 격는 문제입니다. 겉은 목조인데 내부는 벽돌로 기둥구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 천하귀남 2020/08/25 11:11 #

    이게 엄하다 할수 있지만 이걸 안하면 일본식 목수나 서양 중목구조 전문가가 엄청 유리하고 이쪽만 살아 남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러면 전통한옥은 더더욱 도태될겁니다.
  • 천하귀남 2020/08/25 11:55 #

    물론 전통방식으로 2층 올리는 것이 불가능한것도 아니고 현재의 기술로 벽체재로등을 바꾸면 거주성 문제도 해결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짓는 것에는 반대 안합니다.

    헌데 이러면 비용 올라가고 처마길이만큼 안쪽공간이 줄어드니 단가올라간다고 싫어 하겠지요. 이런 얌체들 문제가 2층 한옥의 여건을 엄하게 하고 있기는 합니다.

    전통건축에 벽체까지 건물 면적 인정하고 처마가 길로 튀어나오는 부분은 어느정도 인정했는데 현대 법은 대지경계선 50Cm안쪽 이상 처마가 못 튀어나옵니다. 이 부분 때문에 다층 한옥 짓고 처마 간략화 해 내부공간 조금이라도 넓히는 부분이 특히 문제입니다. 이러는 과정에 은근슬쩍 철물자재 결합이나 시멘트 투성이가 끼어들지요. 이런걸 전통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 역사관심 2020/08/25 12:35 #

    말씀드렸듯 이 글의 주제는 결코 기술적인 부분이 아닌 우리 2층한옥의 역사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천하귀남님 블로그를 포함 여러 글을 읽어 꽤 알고 있습니다. 짚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다시 고민해보고 추후 쓸 기회가 있으면 현재 어디까지 연구가 되고 있는지 파악한 후 써 보도록 하지요. 다만, 저는 현재의 제가 다루고 있는 다른 한국학분야처럼 우리한옥의 '전통기술'이란 부분자체에 대해 더 열린 쪽이라 이견이 있으실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차일테니 이해해주시면 좋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無碍子 2020/08/24 22:51 #

    위치불명이라고 표기된 건물은 간판으로보면 신행상회지점인데 신행상회의 지점은 종로2가에 하나만 두었다고합니다.

    지점을 경영하던분이 본점 사장님이었는데 별도의 회사로 갈라나와 지점 자리에 화신상회를 창업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 건물의 위치는 당시 종로 2정목 5. 지금 종로타워가 있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 역사관심 2020/08/24 22:56 #

    무애자님, 좋은 정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정보를 추가했습니다.
  • 응가 2020/08/31 21:20 #

    사실 중층, 삼층건물은 조선시대에서 계속 등장하고 사진으로도 확인 가능한데 다짜고짜 일본식이라 몰아가는건 안타깝습니다.
    평양, 의주, 개성은 물론이고 하물며 서울 운종로에도 2층상가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말이죠(https://newsimg.hankookilbo.com/cms/articlerelease/2018/10/05/201810051709371313_56.jpg)
    제가 새로 발견한 사진이 있는데, 1947년 평양 대동강가의 모습이라 합니다.(첫번째 사진:http://m.blog.koreadaily.com/myhome/myblog.html?uid=mansaok&pid=357076)
    남아있었더라면 교토 가모가와 강변이 아쉽지 않을 멋진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 역사관심 2020/08/31 23:32 #

    우아~~~~~~~!!!! (이런 감탄사를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선명한 대동강가 사진! 전율이 입니다. 제가 그토록 찾던 꿈의 사진인데 이렇게 몇년만에 T.T
    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블로그 주인께 말씀드리고 사진을 소개할 수 있으면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운종로 2층상가도 정말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진인데...이런 선물을;;;;

    감사감사합니다.
  • 백두 잊혀진 역사여행 2020/09/03 13:00 #

    평양 대동강가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안들어가지네요ㅠㅠ 혹시 어떤 블로그인지 알수 있을까요?
  • 역사관심 2020/09/03 22:08 #

    이상하네요, 바로 그제까지 됐었는데... 제가 사진을 블로그 링크를 걸고 소개할까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 응가 2020/09/04 00:50 #

    http://www.hani.co.kr/arti/PRINT/160983.html >>여기로 한번 들어가보시기 바랍니다.
    1947년 소련군정 하 평양 의 사진입니다.
  • 역사관심 2020/09/04 01:29 #

    이 사진으로 소개해야겠습니다. 더 고화질이네요! 감사합니다 응가님.
  • 백두 잊혀진 역사여행 2020/09/04 11:25 #

    오! 감사합니다!
  • 낙랑 2020/09/12 00:34 #

    안녕하세요~ 몇가지 중복되는 사진이 있을지 모르지만 평양사진 자료 참조하시라고 올려드려요~

    https://ruspekh.ru/images/articles/8612/2020-08-08_458-482923_609.jpg

    해방후 평양에 진주하는 소련군1

    https://koryo-saram.ru/wp-content/uploads/2016/08/11140292_932076683530291_8229763278852212491_n.jpg

    해방후 평양에 진주하는 소련군2

    https://koreadailytimes.com/social/276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4562.html
    면리(동)인민위원회선거(응가님이 소개해주신 대동강가 다른 각도)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227993.html

    https://kobay.co.kr/kobay/item/itemLifeView.do?itemseq=20012QXBXO4

    https://kobay.co.kr/kobay/item/itemView.do?itemseq=200867TUJDZ
  • 역사관심 2020/09/11 23:11 #

    낙랑님, 귀한 자료들 너무 감사합니다. 그동안 위치나 사진이 흐려서 궁금했던 부분들이 상당부분 해소되네요! 언제 모아서 소개해 봐야겠습니다. ^^
  • 자뻑하는 공룡 2020/10/15 22:01 #

    안녕하세요~ 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보령 이주성가옥이 아직 남아있는 건축물인가요? 찾아봐도 안나오네요ㅠㅠ
  • 역사관심 2020/10/21 23:58 #

    뒤늦게 답글을 답니다. 이주성가옥은 논문에서만 나올 뿐 사실 지금 현전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혀 정보가 없는 걸 보면 사라진 것 같기도 한데, 사진은 (저 유일한 것) 컬러인지라 최근것 같아서 확신할 수는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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