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한국에서의 중세건축 용어문제 (樓는 다라기라 (「누」는 다락이다, 15세기) 한국의 사라진 건축

3년전 이런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이 글에서 주요부분을 일단 조금 소개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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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입견은 무서운 것이어서 실상 樓라는 개념자체가 '2층이상건축물' 특히 주변국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2층이상의 '벽체를 가진 보통의 건물임을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라진 건축 (7)- 구체적인 고려시대 '누樓'의 모습 (중층과 벽)
사라진 건축 (9)-고려.조선전기 이층침실, 침루(寢樓)

애시당초 타국에서는 樓라는 글자는 이런 주위가 뻥 뚫린 亭(정)자형 건축을 가리키는 경우가 그다지 없습니다.  
안동 만대루

단층이건 복층이건 사방이 뚫리면 정(정자)이란 개념이 강합니다.
舣舟 (중국 장쑤시 의주)

爱晚 (중국 후난성 애만)

정말 이상할 정도로 한국만이 이렇게 사방이 뚫려있는 그리고 약간 지상에서 올라간 건축을 '루'로 모두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루'라 하면 벽체가 있는 건축은 아예 인식에 없다시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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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침 樓寢이 "누각과 침실"인가?

앞서 소개한 몇 글에서 필자는 우리 중세건축중 '침루(樓)'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즉, 잠을 자는 용도의 숙박용 다층건물입니다. 
寢 (잘 침) 樓 (다락 루, 층집 루)

하지만 '침'이란 글자에는 휴식하다는 뜻도 있으므로 혹 요즘같은 정자형 루도 포함하지 않나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최소 요즘 우리가 보는 건축과 다른 온전한 2층건축 (숙박용)이 있었음은 앞서 소개한 글에서도  문맥상 다른 해석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확히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에서도 그런 맥락을 살필 수 있을 텐데, 오늘은 '침루'를 뒤바꾼 '루침樓寢'이란 글자의 해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재 고전번역원측에서는 이 글자를 누각과 침실이라고 즉 두 개의 명사로 나누어 해석합니다. 이런 식입니다.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8월 5일 辛卯 1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부엉이가 경복궁 누각과 침전 위에서 울다
○辛卯/鵂鶹鳴于景福宮樓寢殿上。
부엉이가 경복궁 누각과 침전(寢殿) 위에서 울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이 樓寢이란 글자는 정확히 총 5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모두 태종(太宗, 1367~ 1422년)-세종(朝鮮 世宗, 1397~ 1450년) 대에만 몰려 있습니다. 만약 '누각과 침전'이란 말이 관용어로 쓰이는 단어조합이라면 상식적으로 당연히 후대에도 계속 등장해야 합니다. 루와 침전은 다층이건 단층이건 후대에도 계속 건립된 건물이니까요. 그러나 이 조합은 이 시대에만 국한되어 등장합니다. 이는 조선전기에 '침루'형식 즉, 2층이상의 건물에서 자는 형식이 존재했고, 후기에는 사라졌다는 하나의 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현재 제공되고 있는 위의 해석은 얼마나 한국건축학계가 우리의 전통 다층건축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실은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鵂鶹鳴于 부엉이가 
景福宮樓寢殿上 경복궁 루침전(寢殿) 위에서 울었다 (즉 누각형식의 침전).

계속 소개해 보지요.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3월 18일 戊寅 2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창덕궁의 누각·침실과 진선문 밖의 돌다리 공사에 박자청을 감독관으로 하다

○搆樓寢室于昌德宮, 又作進善門外石橋, 以工曹判書朴子靑董其役。
누각(樓閣)과 침실(寢室)을 창덕궁에 짓고, 또 진선문(進善門) 밖에 돌다리[石橋]를 놓았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 박자청(朴子靑)을 시켜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해석을 보면 마치 "樓閣 (누각)"이란 단어와  "寢室(침실)"이란 단어가 제대로 들어간 합성어인양 오해하기 딱 좋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이러하지요.

樓寢室于昌德宮
즉, 樓寢室 (누침실)을 昌德宮(창덕궁)에 지었다.

역시 누각형식의 침실 (복층침실)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8년뒤인 세종 1년의 기록입니다.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10월 4일 乙亥 6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새로 수강궁루의 침실을 짓다
○新作壽康宮樓寢室。
새로 수강궁루의 침실을 지었다.

여기서는 제대로 해석해 두었습니다 (유일하게 이런 식으로 해석한 기사입니다). 위의 해석대로 일관되게 했다면 '수강궁의 루와 침실을 지었다'라고 했겠지요. 이 구절 역시 어떻게 보아도 '루에 있는 침실'이라는 이 번역이 옳습니다. 

그 다음의 유명한 세종 27년조의 정보는 명확히 위의 '루침실'들이 누각에 있던 침실임을 보여주는 구체적 기사입니다.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1월 28일 壬寅 1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거처를 연희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승정원에 전지하다
○壬寅/傳旨承政院:
昨日左議政等以衍禧宮多蟲蛇, 請幸椒水里, 不從, 又請幸開城, 又不從。 然忽思之, 若蟲蛇果多, 恐未安心過夏。 且松木鬱密, 而北垣低微, 樓寢遮陽朽破, 將伐松築垣, 修葺遮陽, 予欲移御他處, 畢修而還。

命宦者田吉洪, 往審喜雨亭修治。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어제 좌의정 등이 연희궁에는 벌레와 뱀이 많이 있다고 하여 초수리(椒水里)로 가기를 청한 것을 듣지 않았고, 또 개성으로 가기를 청한 것도 또 듣지 않았으나, 문득 생각하니 만일에 벌레와 뱀이 과연 많다면 안심하고 여름을 지내지 못할까 싶다. 또 소나무가 울밀하고 북쪽 담이 낮고 미약하며, 다락(루) 침실의 차양(遮陽)이 모두 썩고 부서졌으니, 장차 솔을 베고 담을 쌓고 차양을 수리하여야 하겠으므로, 내 다른 곳에 옮기었다가 수리가 끝난 뒤에 돌아오려고 한다. 환자(宦者) 전길홍(田吉弘)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을 가 보고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아직도 의심스럽다구요, 다음을 봐주시지요. 다음은 1482년 성종 13년조 기사에 나오는 궁궐도 아닌 일반 저택의 루침실의 묘사입니다.

성종실록 142권, 성종 13년 6월 16일 癸丑 2번째기사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제안 대군의 아내 박씨가 종과 동침한 일은 무고한 것임을 아뢰다
○ 중략. ’ 又一日, 今音德倚我枕, 欲接我口, 我言: ‘婢主間敢如此哉?’ 叱之猶不已强之, 且言: ‘夫人之乳甚好。’ 請捫摩, 我以手揮置。 又一日夜, 無心到樓寢室下, 推問屯加未、內隱今、今音德、今音勿等, 我則入睡不知, 翌日朝聞無心聲, 問諸內隱今, 答云: ‘無心推問吾等: 「與夫人同寢。?」 答云: 「以夫人之敎同寢。」’  중략.

또 하룻밤에는 무심(無心)이 다락 침실(寢室) 아래에 이르러서 둔가미·내은금·금음덕·금음물 등을 추문(推問)하였는데, 나는 잠이 들어 알지 못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무심의 목소리를 듣고 내은금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무심이 우리더러 「부인과 동침했느냐?」고 묻기에, 「부인이 시켜서 동침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였습니다.

보시다시피 한밤중에 무심이라는 자가 박씨부인이 자고 있던 '루침실 아래 (樓寢室下)'에 와서...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명확히 한밤에 숙박하는 형태의 '루침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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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앞서 소개한 3년 전 포스팅의 일부정보입니다. 지금부터는 새로 찾아낸 정보를 소개합니다. 


우선 樓(루)의 현대한국에서의 정의를 살펴 볼까요. 다음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제공되는 정의입니다.
1번뜻은 다락, 그리고 4번에 '층집' (즉 중층집)의 뜻이 있습니다. 그럼 '다락'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요?
다락은 부엌위에 수납공간정도, 그리고 2번뜻으로 현재 우리가 흔히 아는 사방이 뚫린 조금 높은 마루를 가진 (기둥기반) 집을 수록하고 있군요. 굳이 강조한 '벽이 없이' 란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다락'의 뜻이 조선전기(최소)에는 달랐음은 이미 그제 소개한 바 있습니다.

네이버 사전만의 해석일 수 있으니 다른 낱말 사전을 볼까요? 다음은 위키낱말사전입니다.

여기서는 1번뜻만 적어 두었네요. 부엌위의 작은 수납공간. 과연 조선전기-중기에도 다락과 루의 뜻이 이랬을까요? 

우선 그 당시에도 '루'= 다락이란 뜻이었는지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세조대에 편찬된 1459년의 [월인석보]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월인석보
[주태]
菩薩이 예 주1) 드러 겨 제 夫人이 六度 주2)  修行더시니 【월인석보 2:25ㄱ六度 布施와 持戒와 忍辱과 精進과 禪定과 智慧니 布施 제 뒷논 주3) 쳔로 주4)  주며 제 아논 法으로  칠씨오 持戒 警戒 디닐씨오 忍辱 辱 일 씨오 精進은 精誠으로 부텻 道理예 나갈씨오 禪定은  寂靜히 야 주5) 一定씨오 智慧 몯 아논  업시  비췰씨라 度 걷날씨니 주6) 뎌  주7) 걷나다 혼 디니 生死 이녁 주8) 오 煩惱 므리오 涅槃 뎌녁 주9) 라 修行 닷가 주10) 行월인석보 2:25ㄴ씨라】 하해셔 飮食이 自然히 오나 주11) 夫人이 좌시고 주12) 아모 라셔 주13) 온  주14) 모더시니 그 後로 人間앳 차바 주15)  주16) 몯 좌시며 三千 世界 時常 가 이시며【三千은 小千 中千 大千이라】 病니 다 됴며 三毒 주17) 이 업스며【三毒 貪心과 嗔心월인석보 2:26ㄱ과 迷惑괘라】 菩薩ㅅ 相好ㅣ 다 시며 보옛 樓殿이 마치 天宮 더니【樓는 다라기라】 菩薩이 니시며 셔 겨시며 안시며 누샤매 주18) 夫人이 아라토 주19) 아니더시니
날마다 세 로 주20) 十方 諸佛 주21) 이 드러와 安否시고 說法월인석보 2:26ㄴ시며 十方 同行菩薩이 다 드러와 安否시고 法 듣시며【同行  녀실씨라】
 아 色界 諸天을 爲야 說法시고 나 欲界 諸天을 爲야 說法시고 나조 주22) 鬼神 爲야 說法시고 바월인석보 2:27ㄱ도 세  주23) 說法더시다

이 부분은 세종때 수양대군 (즉 세조)가 1447년 적은 글임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월인석보]중 [월인천강지곡]의 원문부분이므로 세종대인 당대에 지어진 글입니다. 그런데 여기 매우 중요한 조선전기 건축용어 사례가 나옵니다.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의 부분입니다.

보살의 모습이 다 갖추어져 있으며, 보배로 꾸민 누전이 마치 천궁과 같더니【‘누’는 다락이다】 보살이 다니시며, 서 계시며, 앉으시며, 누우심에 부인이 아무렇지도 않으시더니

'보배로 꾸민 누전이 천궁같은데' 란 구절에 세조가 "누(루)"는 다락이다"라는 해석을 달아 놓은 것입니다. "樓殿"누전의 '루'가 '다락'형태의 건축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누전'이란 말은 중층의 '궁궐'을 말합니다. 당연히 사방이 뚫린 현대 한국의 '루'개념이 아닌 제대로 된 2층이상의 건물을 뜻하는 것이고, 이런 건축에 '다락'이란 말을 주석으로 달아 둔 것이지요.

원문을 그대로 볼까요?
이 부분입니다.
'루는 다락이다'. 명확하지요.

따라서 조선전기에도 '루'는 한국어발음으로 '다락'이라 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이 '다락'의 의미는 현재의 부엌 수납공간이 '아닙니다'. 
조선전기 다락 (즉 루)위에 남편을 숨기는 모습 (1596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삽화)

한가지 사례만 더 볼까요? 이번에는 1447년 [석보상절]중 나오는 정보입니다.

석보상절
[라후라의 출가 3]
耶輸 주1) ㅣ 그 긔별 드르시고 羅睺羅 주2) 더브러 노 樓 우희 주3) 오시고 【樓는 다라기라】 門 주4) 다 구디 주5) 겨 주6) 뒷더시니 주7) 目連이 耶輸ㅅ 宮의 가 보니 門 다 고 주8) 유무 주9) 드 주10) 사도 업거늘 즉자히 석보상절 6:3ㄱ神通力 주11) 으로 樓 우희 라 올아 주12) 耶輸ㅅ 알 주13) 가 셔니 耶輸ㅣ 보시고 녀론 주14) 분별 주15) 시고 녀론 깃거 주16) 구쳐 주17) 니러 주18) 절시고 안쇼셔 시고 世尊ㅅ 安否 묻고 주19) 니샤 주20) 므스므라 주21) 오시니고 주22)

[라후라의 출가 3]
야수가 그 소식을 들으시고 나후라를 더불고(라후라와 함께) 높은 누 위에 【「누」는 다락이다.】 오르시고 문들을 다 잠그게 하여 두셨더니, 목련이 야수의 궁전에 가보니 문을 다 잠그고, 소식을 들여보낼 사람도 없거늘, 곧 신통력으로 다락 위에 날아 올라 야수 앞에 가서 서니, 야수가 보시고 한편으로는 걱정하시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여, 마지못하여 일어나 절하시고, “앉으십시오” 하시고, 세존의 안부를 묻고 말씀하시기를,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또 다시 '누'는 다락이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부분.
이제 당시 '루= 다락'임은 명확한 듯 합니다. 그 '다락'이 2층건축을 뜻했음은 이미 위의 삽화예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저렇게 완전한 중층건축 (상하층에 모두 벽체와 창문이 있는)도 뜻했지만, 2층이상의 높은 공간을 가진 건축을 뜻하기도 했음을 다음의 예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소개한 삽화와 같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나오는 용례입니다.

氏墜樓
俞氏京都人 判書俞起昌之女 大司憲柳世琛之妻也 性行貞順 夫婦相敬如賓 治家有聲 世琛爲忠清道觀察使在任而 歿俞氏聞訃即沐浴改服登樓投死盖欲死而同葬也閭里親戚莫不歎服 恭僖大王朝㫌門

이성  1617년(광해군 9)
유시 경도 사이니 판셔 유긔챵의 이오 대헌 뉴셰팀의 안해라 셩이 뎡슌야 부쳬 서로 공경기 손 티 고 집 다리기 소 읻더라 셰팀이 튱쳥도 관찰 야 소임의 이셔 주그니 유시 부음 듣고 즉시 목욕 복고 다락긔 올라 려뎌 주그니 주거  영장고져 호미라  사과 친쳑이 탄복디 아니리 업더라 공희대왕됴애 졍문시니라

유씨추루 - 유씨가 남편 따라 다락에서 떨어져 죽다
유씨는 서울 사람이니, 판서 유기창(俞起昌)의 딸이고, 대사헌 유세침(柳世琛)의 아내다. 성질과 품행이 곧고 순하여, 부부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과 같이 하고, 집 다스리기를 〈잘 하였다는〉 소리가 있더라. 유세침이 충청도 관찰사를 하여 맡은 바 임무가 있어 죽으니, 유씨 부음을 듣고 즉시 목욕하고 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다락에 올라 떨어져 죽으니, 죽어서 함께 영장하고자 함이라. 마을 사람과 친척이 탄복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더라. 공희대왕조에 정문을 세웠다.

1617년 광해군대 이성이란 사람이 적은 문장으로 여기 보면 열녀 유씨가 남편을 따라 '다락에서 투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삽화가 고맙게 실려 있으니 다음의 그림입니다.
이렇게 축대같은 높은 하부구조를 가진 2층건축에서 투신하는 그림이 실려 있지요. 따라서 이런 구조 역시 '다락'이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락긔 올라"라고 분명히 한글로 표기되어 있지요.
다음으로 당대 '누각'이란 단어를 찬찬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루'라는 글자가 가장 복합어로 많이 쓰이는 예가 '누각'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누각=루'로 볼 정도지요. 과연 이 '누각'이란 단어가 조선전기에도 요즘처럼 사방이 뚫린 형태의 기둥으로 받친 큰 정자형 건물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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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觀)과 누각(樓閣)

우선 '관'이란 글자의 뜻을 살펴봅시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이러합니다.

볼 관(觀)자이나 건축용어로 9번뜻에 '누각'이란 글자가 보입니다. 역시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이라는 이상한 한국식 설명이 보입니다. 아시아 어느 국가에서도 '누각'이란 단어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다락= 루'라 했으니 루=누각이란 시각을 보여주는 네이버사전 정의라 할 것입니다.

왜 '관'이라는 글자에 주목을 했느냐, 그 이유가 다음에 있습니다. 다음은 역시 같은 1459년 편찬된 [월인석보]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불경인 [아미타경]을 해석한 부분으로, 초반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원림대관으로 하시며" 불교계건축을 의미하는데 '원림'은 정원이며 '대관'은 큰 건축물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이런 한글해석이 달려 있습니다.

'관'은 루이다'. 

과연 이 '관'이 네이버 설명처럼 저 '원림보전"이 문과 벽이 없이 사방이 뚫린 건축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럼 다음으로 '누각'에서 '각'자를 살펴 봅시다. 閣 각이란 글자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다음은 같은 저서에 1447년 수양대군이 설명을 쓴것이라 명시된 부분입니다.

 舍利弗아 極樂 國土애 七寶 모시 주1) 잇니 八功德 주2) 水 고 주3) 못 미틔 주4) 고 주5) 金 몰애로 주6)  오 주7) 네  버 길헤 주8) 金 銀 瑠璃 玻瓈로 뫼호아 주9) 오 주10) 우희 樓월인석보 7:64ㄴ閣이 이쇼 주11) 【閣 굴근 지비라】  金 銀 瑠璃 玻瓈 硨磲 赤珠 瑪瑙 주12) 로 싁싀기 주13) 몟니 주14) 모샛 蓮花ㅣ 킈 주15) 술윗바회만 주16) 호 주17) 호 靑色 靑光이며 黃色 黃光이며 赤色 赤光이며 白色 白光이라 微妙코 香월인석보 7:65ㄱ潔니 【香潔은 옷곳고 주18) 조씨라 주19) 】 舍利弗아 極樂 國土ㅣ 이러히 주20) 功德 莊嚴 주21) 이 이러 주22) 잇니라

잘 안보이시죠? 원문을 봅시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또 사리불아, 극락 국토에 7보〈로 된〉 못이 있느니, 8공덕 수가 가득하고, 못 밑에는 고른 금 모래로 바닥을 깔고, 네 가장자리의 섬돌 길은 금·은·유리·파려를 모아 만들고, 위에는 누각이 있는데, 【각은 큰 집이다.】 

위의 원문의 첫 그림의 마지막 글자와 두번째 그림에 '누각'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조가 단 주석에 이런 정보가 나오지요.


閣 각은 굵은(큰) 집이다.

즉, 1400년대 중반 같은 저서에 그것도 궁실에서 펴낸 공식서적의 정보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루는 다락이다.
관은 루이다.
각은 큰 집이다.

그리고 다락은 위의 삽화에서 보시다시피 (1600년대초 삽화) 최소 현대 한국인들의 인식에 자리잡은 부엌의 작은 공간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2층건축구조를 다락이라 칭했습니다.

그렇다면 '루각(누각)'은 당연히 이런 뜻이 되지요.
"중층 큰 집" (다락으로 된 큰 집).

이 뜻은 (어쩌면 자연스럽게도) 현재 중국이나 일본에서 뜻하고 있는 '누각' 그자체입니다. 이런 건축을 그들은 (당연하게도) 지금도 '누각'이라 합니다. 사방이 뚫려 있고 나즈막한 기둥으로 마루를 받친 건축물을 '루'라고 붙이는 건축물은 손에 꼽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아주 좋은 사료가 있습니다. 그것도 바로 동시대의 문헌에 말이지요. 다음은 단종 1년인 (즉, 세종-세조시대) 1452년의 실록기록입니다. 여기 '루'의 의미를 보여주는 실례가 나오지요.

단종 즉위년 임신(1452) 11월 16일(갑술)
사헌부에서 김미를 국문하여 벌을 줄 것을 아뢰니 그대로 따르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문의현(文義縣) 사람 김미(金湄)는 아비가 죽고 어미와 같이 살면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합집(合執)하고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집 1구(區)를 짓는데 1백 9간(間)으로 하고, 그 창고에는 미증영만(彌增盈滿)ㆍ익억 만첨(益億萬添)의 8자(字)로써 현판을 나누어 달고, 이를 진고(珍庫)라 부르며, 집 가운데에 높은 누각(樓閣)을 세워 진루(珍樓)라 부르고 그 양쪽에 깊숙한 방을 만들어 비첩(婢妾)과 기녀(妓女)들을 나누어 두고 정욕(情慾)을 자행(恣行)합니다. 아내 장씨(張氏)와 딸들은 욕실(浴室)을 따로 두고 있습니다. 

中置高 중앙에 높은 루를 짓고 
珍樓。 '진루'라고 칭했다 (즉, 보배같은 누각)
兩旁作幽房, 양쪽에 깊은 방들을 만들어서.

높은 루를 만들고 방들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영남루같은 나지막한 기둥위의 텅 빈 공간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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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건축학의 큰 숙제는 한국의 누각들은 (영남루, 촉석루, 등등) 타국과 달리 독특하다라는 것 뿐 아니라 (아니 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으로) '왜 언제 '누각'의 의미가 한국에서만 이런 대형 정자형 건축으로 협의의 정의로 바뀌었나 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다락'이란 단어의 의미도 마찬가지겠지요.

왜냐하면 이 '루'와 '다락'의 단어의 명확한 시대별 구분이 들어간 정의가 내려져야만, 앞서 소개한 '침루'(침실형 루)를 '침실과 누각'으로 해석하는 커다란 오류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단순히 '단어의 정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의미가 현대인들의 인식에 고정적 이미지를 가지게 만들게 됩니다. 그럼 이런 복원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윗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찍힌 창덕궁 소주합루, 즉 승화루입니다. 아래는 복원한 현재의 승화루의 아래부분. 벽체를 아무런 이유없이 다 없애고 기둥만 남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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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452년 당대에는 행랑을 2층형식으로 지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문종실록 13권, 문종 2년 4월 11일 乙亥 3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의금부 도사 정옥경을 국문토록 하다
성균관 생원(生員) 박계금(朴繼金)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신 등이 지금 가요(歌謠)를 바치는 일로써 와서 의금부(義禁府)의 곁에 모여 있었더니,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정옥경(鄭沃卿)이 처첩을 거느리고 행랑(行廊)의 누각(樓閣) 위에 있으면서 자기가 관장(管掌)한 산대 나례(山臺儺禮)554) 를 그 아래에 모두 모아놓고, 나장(螺匠)555) 5, 6명으로 하여금 쇠사슬을 쥐고서 사람들을 물리치고 갖가지 유희(遊戲)를 설치해 놓고서 처첩(妻妾)들과 함께 구경하고 있었는데, 학생(學生) 두서너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다가 나장(螺匠)에게 매를 맞게 되므로 붙잡고 서로 힐책(詰責)하니, 

率妻妾在行廊樓上, 행랑누각위에서
悉聚所掌山臺儺禮于其下,

이런 식의 다양한 건축형태를 좀 더 실증적으로 자세히 (무엇보다 현대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시각 그대로) 들여다보는 연구가 나와주면 합니다.




핑백

  • 까마구둥지 : 한국인의 인식에 없는 망월루 누각위의 방 (望月樓牧丹房) 2020-12-03 08:27:11 #

    ... 앞선 글에서 중세이전 한국건축에서의 용어문제, 특히 '루'에 대한 해석부분에 대한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현대한국에서의 중세건축 용어문제 (樓는 다라기라 (「누」는 다락이다, 15세기) 오늘은 비슷한 맥락의 오역까지는 아니지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번역을 더 정확하게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다음은 [ ... more

덧글

  • 더러운 이누이트 2021/02/01 18:38 #

    루침(樓寢)은 침루(寢樓)는 의 다른 표현 같습니다.

    <성종실록> 성종 9년 무술(1478) 8월 22일(신해) 신분에 따른 주택 규제에서 대군의 주택에만 침루가 등장합니다. 단 다른 신분의 주택에는 침루가 없어도 루주가 사용되지요. 즉 대군의 주택에는 침루가 별동으로 존재할 수 있고, 다른 신분의 주택에는 아마도 정방에 루가 붙어 있는 형식만 허가된 것 같습니다.

    원문 읽어보시면 루주 높이는 다른 주(기둥)에 비해 3자 정도만 깁니다. 완전한 2층이라기 보다는 그냥 지면에서 어느 정도 들어 올리는 수준이지요.


    성종실록의 주택규제 원문
    大君家六十間內, 正房、翼廊、西廳、寢樓竝前後退十二間, 高柱長十三尺, 過樑長二十尺, 脊樑長十一尺, 樓柱長十五尺, 其餘間閣柱長九尺, 樑長、脊樑長各十尺。 王子、諸君及公主家五十間內, 正房、翼廊、別室竝前後退九間, 高柱長十二尺, 過樑長十九尺, 脊樑長十尺, 樓柱長十四尺, 其餘間閣柱長、樑長各九尺, 脊樑長十尺。 翁主及二品以上家四十間, 三品以下三十間內, 正房、翼廊竝前後退六間, 高柱長十一尺, 過樑長十八尺, 脊樑長十尺, 樓柱長十三尺, 其餘間閣柱長、樑長各八尺, 脊樑長九尺。 庶人家舍十間內, 樓柱長十一尺, 其餘間閣柱長各八尺, 脊樑長九尺, 竝用營造尺。
  • 더러운 이누이트 2021/02/01 18:44 #

    루가 붙어 있는 ㄱ자 한옥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21/02/04 05:14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우선 말씀하신 성종실록기록은 이미 이전글에서 분석한 바 있습니다. 대군이든 다른 신분이든 모두 루주자체의 길이만 보아도 완전한 2층이라 개인으로는 생각합니다. http://luckcrow.egloos.com/2586439
    따라서 이런 기록이 당대에 나온다 생각합니다.

    성종 23년 임자(1492,홍치 5) 4월21일 (신유)
    여러 군과 옹주의 집을 짓는 규모를 정해 영구히 정식을 삼게 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허집(許輯)이 아뢰기를,
    “여러 군(君)과 옹주(翁主)의 집이 지극히 높고 큰 것을 힘쓰므로, 그전 옛집의 재목과 기와는 모두 버리고서 쓰지 않으며, 반드시 아름다운 재목을 탐내니, 하나의 나무를 운반하는 데도 백성의 힘이 이미 곤고(困苦)해 집니다. 만약 침실(寢室)과 객청(客廳)이라면 그만이겠지만, 그 나머지는 비록 그런 재목을 쓰더라도 또한 가합니다.”

    諸君、翁主之家, 務極高大, 其舊家材瓦, 皆棄而不用, 必得美材, 一木之輸, 民力已困。 如寢室客廳已矣, 自餘雖用舊材亦可也。

    諸君, 翁主之家, 대군들과 옹주들의 집들이
    務極高大, 극히 높고 크다.

    개인적으로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루침과 침루가 같은 단어로 쓰였을 경우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있지만, 루침의 경우 그냥 누방처럼 '누에 있는 침실'로 썼을 경우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ㄱ자한옥에 있던 경우도 있을 수 있겠고, 이런 식의 건물도 충분히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http://luckcrow.egloos.com//2575082). 이런 '사고'같은 건물은 위의 그림과 거의 일치하며 사고자체의 연대가 충분히 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기록들을 보면 한 형태가 아니고 높낮이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http://luckcrow.egloos.com/2615456 http://luckcrow.egloos.com/2586786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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