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긍이 직접 본 고려시대 성곽 높이 (약 10미터급)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예전에 [삼국시대의 거대성벽들]이라는 글에서 삼국시대의 웅장한 산성에 대해 알아본 바 있습니다.

2000년대초반 나성의 사진

그런 다음 사료를 통해 고려시대의 성벽높이가 8미터 이상이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문화관련 소개글에는 이런 설명이 모두 빠져 있습니다. 우선 문화컨텐츠닷컴에 나오는 고려시대의 성곽높이 개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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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통일신라말기 호족들의 난립과정에서 고대산성이 재활용되거나 많은 산성들이 새롭게 축성되었다. 후삼국이 고려에 의하여 통일되고 난 이후 호족의 거점지역이었던 산성들은 폐기되기 시작하였고,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여 산성은 더 높고 험준한 곳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방어성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성벽은 매우 조잡하지만 규모는 커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많은 산성들은 성내의 면적이 좁거나, 물이 부족한 경우 더 이상 늘어난 인구가 들어가 지킬 수 없었으므로, 보다 높고 험한 지형에 규모가 크고, 내부에 계곡을 끼고 있어 물이 충분한 곳을 골라 축성함으로서 지구전(持久戰)에 대응하였다. 따라서 이미 존재하던 산성들은 규모가 크고 성내에 물이 풍부하여 많은 인구가 들어가 지킬 수 있는 것들은 계속하여 수리를 거쳐 사용될 수 있었으나, 규모가 작고 성안에 많은 물이 지속적으로 확보되지 못하는 산성들은 경영이 중단됨으로서 폐허화되어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 역사적 도태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높고 튼튼한 성벽은 때로 쓸모가 있었다. 활과 화살ㆍ창ㆍ칼ㆍ방패 등을 기본 무기로 하는 군사편제와 사다리ㆍ충차(衝車)ㆍ갈고리ㆍ쇠뇌ㆍ마름 쇠ㆍ비루(飛樓)ㆍ포차(抛車) 등의 성곽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무기체계가 유지될 때에는 아직 효용이 있었다. 더구나 소규모의 적침에 대하여는 몽돌 자체만으로도 방어가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몽고족의 침입은 새로운 도전으로서, 당시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전국에 걸쳐 바다의 섬이나 산성에 피난케 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각 고을에는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들이 파견되어 백성들을 입보 하며 농성하게 독려하여 40여 년을 항전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기간의 항전에 유리한 대규모의 산성에 대한 효용이 크게 증가되었다.

문화컨텐츠 닷컴 원문링크- https://bit.ly/36sJy4w

하지만, 정확한 높이에 대한 설명은 빠져있지요. "(삼국시대처럼 고려시대도) 그러나 아직도 높고 튼튼한 성벽은 때로 쓸모가 있었다."라고 되어 있을 뿐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나오는 고려시대 성곽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이에 대한 설명이 없지요

고려시대에도 우선 도성인 개경(開京)의 그리 높지 않은 산허리에 왕성이 있었는데, 거란의 침입 뒤에 둘레를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쌓은 나성이 생겨나게 된다. 고려의 도성도 결국은 삼국의 왕도들이 가졌던 기본적인 축성 구조와 비슷하고, 조선시대의 한양 도성도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전통적인 축성 구조의 연장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성·읍성·산성 이외에 이 시기에는 장성이 쌓여지고 있다.
장성 축조의 첫 기록으로는 백제가 북방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청목령(靑木嶺)에서 서해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는 것이 있다. 그 뒤 고구려의 천리장성, 신라의 패강장성(浿江長城)·동북장성·관문성(關門城) 등이 축조되고, 고려에서는 다시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 말까지의 장성은 국경 근처의 여러 진보(鎭堡)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전통은 세종 때의 압록강 및 두만강 방면의 행성 축조로 이어진다.

한국문화대백과사전 원문링크-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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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국민 모두가 볼 수 있는 대표사이트들에서 성곽의 높이를 빼놓는다는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지각이 있는 역사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가 이런 사이트들에서 정보를 얻고 드라마-영화-웹툰 등에서 성곽묘사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사진들밖에 현재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고려시대의 성곽에 대한 사진은 없을 정도로 관심이 없는 것도 안타깝습니다 (제가 올린 저 몇장의 개성성, 천리장성 사진이 500년 고려의 성곽사진 전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록에 등장하는 고려시대의 성곽의 높이에 대하여 조금 더 소개하겠습니다. 
다음은 [선화봉사고려도경](1123년)에 나오는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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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 성읍(城邑) 
성읍(城邑)

사이(四夷)의 군장(君長)들이 흔히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다니기를 편리하게 여겼으므로, 원래부터 나라에 도읍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역(西域)의 거사(車師)ㆍ선선(鄯善) 등 나라가 겨우 담장을 쌓아 거성(居城)으로 만들 줄 알았으므로, 사가(史家)들이 그것을 가리켜 ‘성곽 제국(城郭諸國)’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고을과 마을을 만들고, 높은 성첩(城堞)을 둘러 쌓아 중화(中華)를 모방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封爵) 받은 옛땅이라서 중화의 전해 오는 풍속과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정에서 간간이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위무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경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이제 그 나라를 세운 형세를 모두 파악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城邑]

臣聞四夷之君。類多依山谷就水草。隨時遷徙。以爲便適。固未嘗知有國邑之制。西域車師鄯善。僅能築墻垣作居城。史家卽指爲城郭諸國。蓋誌其異也。若高麗則不然。立宗廟社稷。治邑屋州閭。高堞周屛。模範中華。抑箕子舊封。而中華遺風餘習。尙有存者。朝廷間遣使。存撫其國。入其境。城郭巋然。實未易鄙夷之也。今盡得其建國之形勢而圖之云。

글 처음에 보면 서역지역의 국가들이나 선선 (고대 위구르지역에 있던 국가)등을 제외하면 보통 성곽을 높이 쌓는 국가가 제대로 없지만, 고려는 제대로 높은 성첩을 둘러 쌓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다음부분.

入其境。그 국경에 들어가면
城郭巋然。성곽이 높이 솟아 우뚝하니

고려에 들어서면 성곽이 높음을 표현하는데 글자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巋 가파를 쟁
然 틀림없을 영
巋然 (한 단어로 높이 솟아서 우뚝하다란 뜻입니다).
實未易鄙夷之也 실로 천한 오랑캐라고 쉽게 볼 수 없다.

굉장히 높게 묘사한 것이지요.
현재 남아있는 나성구간 (3-4미터 구간)

우선 명백한 고려당대의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나옵니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20년(1029년), 송 천성 7년ㆍ거란 태평 9년
○命參知政事李可道,左僕射異膺甫,御史大夫皇甫兪義,尙書左丞黃周亮,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開京羅城,先是,平章事姜邯贊,以京都無城郭,請築之,可道初定城基,令人持傘環立,登高而進退之,均其闊狹,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廊屋四千九百一十間。

○ 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1029년 완공되는 이 나성은 흥미롭게도 둘레의 길이는 꽤나 차이가 나는데 비해 높이는 정확히 27척이라는 기록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고려시대의 영조척인 고려척이 35.5 센티미터이니 9.58미터가량이 되지요 (이전글에서는 조선시대 척으로 8.1미터라고 계산했었습니다). 즉, 거의 10미터가량이 되는 고성벽인 것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높은 성곽이 즐비하던 당시 송나라에서 온 서긍의 눈에도 저런 식으로 묘사될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참고로 서긍이 고려를 방문한 시기는 1123년, 그리고 저 고려사절요의 나성 기록은 1029년입니다. 94년의 시차정도입니다.

2000년대초반 남아있는 나성부분

따라서 예를 들어 993년, 1010년, 1018년에 벌어진 고려-거란 전쟁등을 그릴 때 고려말 급증한 작은 읍성위주로 묘사하는 것에 그쳐서 현재 우리가 보는 한양성곽이나 조선읍성으로만 우리의 통시적 성곽묘사를 그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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