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금의 건국이후, 금에 대한 태도는 보통 실리를 기반으로한 균형정책을 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금 역시 고려에 대해 평화정책을 편 것으로 알고 있구요- 오죽하면 형제국가같은 형세로 표현도 합니다.
그건 정치적인 스탠스면에서이고,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고려인들의 금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명확히 알수 있는 기록은 그다지 많이 못봤기에 오늘 발견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단 위키백과와 문화컨텐츠닷컴에서 고려의 금에 대한 태도를 한번 살펴보지요.
그 후 곧 완안씨의 아골다(阿骨打)는 요나라에 모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금(金)이라 정한 뒤 1115(예종 10)에는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도록 하였다. 고려는 처음에 요나라 연호를 중지하고 그 뒤로는 형세를 관망하면서 송나라와 친밀히 지냈다. 1126년(인종 4) 금나라가 이미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에서는 금나라의 정령을 받기로 하였으나 그 태도는 금나라의 요망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고려의 신하들 사이에는 금나라를 섬겨야 된다는 일파와의 갈등이 있는 한편 고려를 원조하려는 송나라의 열망도 있었고, 당시의 국제관계도 대단히 복잡하였으나 고려는 1131년(인종 9) 결국 금나라에 복종하여 그 대가로 오랫동안 갈망하던 보주를 다시 찾아와서 이것을 의주라고 개칭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극히 필요한 사대관계는 금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는 한편, 정치성을 떠난 남송(南宋)과의 교섭도 끊어지지 않았다.
-위키-
12세기 초에 여진족이 금을 건국하고, 1125년(인종 3)에 요를 멸망시키고 나서, 송을 남쪽으로 쫓아냈다. 그 후 중국 대륙은 북방 여진족의 금과 남방 한족의 송이 서로 대립함으로써, 고려에게 다시 한번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우는 외교정책을 펼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을 제공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고려로 하여금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금에 대해서 정치,군사적인 관점으로, 송에 대해서는 송상(宋商)을 통한 문화,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서로간의 교류를 지속함으로써 실리에 바탕을 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문화컨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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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조 아골타
이를 보면 금에 대한 태도는 실리적으로 접근하되, 결코 수그리지는 않는 느낌이지요. 그런데 이익(李瀷, 1681~1764년)의 [성호사설]에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성호전집
貴夏賤夷。爲無義也。我自反覆。何賤乎彼哉。元之於麗。自忠烈以後恩厚至矣。及其衰而背之可乎。昔金國有言百物皆可馴。惟高麗人不可馴。令人捧腹。陳張之於明。其初無別。若以義則張反勝矣。
昔金國有言百物皆可馴。惟高麗人不可馴。令人捧腹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합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日本忠義日本雖居海島,開國亦久,典籍皆具,北溪《性理字義》、《三韻通考》,我人從倭得之。[鼎福按: 《攷事撮要》舊本慶州冊板有《北溪字義》,則中間泯滅,而後因金東溟使日本持來,復行于世。]至於我國之《李相國集》,國中已失,而復從倭來,復刊行于世。凡倭板文字皆字畫齊整,非我之比,其俗可見。馬島人詐諼註特甚,然深處民俗有忠信諒直,雖國中陰事不諱。意者巧黠之風,我國尤甚。遼、瀋人有云: “世間百物無不可擾,猛獸鷙鳥亦或可馴,惟高麗人不可馴。”
조금 더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昔金國有言百物皆可馴 옛 금나라의 속담(전하는 말)에 백가지 것(세상 모든 것)을 길들일 수 있으나
猛獸鷙鳥亦或可馴 맹수와 맹금류조차 간혹 길들일 수 있으나
惟高麗人不可馴。오직 고려인만은 길들일 수 없다.
惟高麗人不可馴。오직 고려인만은 길들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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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금에 대한 고려인에 대한 것일 수도 아니면 어쩌면 금과 한반도국가와의 오래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짧지만 많은 것을 전해주는 오래된 구절같아 나눕니다.








덧글
실제로 뿌리는 건 미국의 100분의 1도 안될텐데, 그러고서 더 걷어가려고 하는데 반발이 안나오겠습니까.
그게 지금 일대일로의 국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인 거고요.
중국인을 '장궤'에서 유래한 짱깨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할 겁니다.
구르는 놈 따로 돈 버는 놈 따로.
돈 잘 벌게 해준다고 해서 실컷 구르고 보니 어느새 돈은 장궤가 다 차지. 조선인은 손만 빠는 사태 발생.
그게 김동인의 감자를 만든 거죠...
이 두 갈래 그룹은 금에 대한 외교 노선의 차이점으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같은 유혈 충돌을 빚어내며 고려 정치를 혼란으로 초래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승자는 김부식 등의 대금 외교파에게 돌아갈수밖에 없었지요
금에 대한 사대외교 논쟁은 예종대부터 처음 제기되어 왔지만 그러나 과거 자국에게
조공이나 바치는 부족 출신의 국가를 사대로 섬긴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아
대금 사대를 그때 실현되지 못하다가 인종 즉위로 이자겸이 집권하면서 대금 사대외교를
처음올 채택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자겸 정권 붕괴 후에 이자겸 정권이 채택한 대금 사대외교의 존폐 유무를 두고 개경파와 서경파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게 되어 그 결과가 묘청의 난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