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과 거대함은 죄인가? 한국고건축학계의 공간론 비판 (첨언) 한국의 사라진 건축

[알쓸신잡과 공간론]과 [더이상 뜬구름잡기는 그만- 의미있는 조경사 논문 (2017)]이란 글에서 이미 한번 불만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만, 필자는 비단 건축뿐 아니라 한국학 전반의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한 연역적 접근론이 이제는 하나의 담론으로 내려가고 또다른 한국의 통시적 미를 담아낼 수 있는 대안이 떠올라야만 더 건강한 문화담론이 펼쳐지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전편이나 다름없는 한국 건축학계의 공간론의 기원에 대한 대한 조금 더 깊은 글은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짧은 글은 윗글에 대한 첨부글이자 개인적인 그간 쓴 글들의 정리차원의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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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미 10년전 은퇴하신 바 있는 명지대학교의 고건축학자 김홍식교수의 글중 일부분입니다. 이 명지대학교 고건축학과는 한국의 고건축학계를 이끄는 대표적인 그룹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은퇴전 [우리나라 고건축의 이해]라는 글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고건축의 이해” by 김홍식(명지대학교)

한옥 공간구성의 특성
가. 시대정신 (철학)은 건축 형태를 변화시킨다.

어떤 시대나 사회적 모순은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이 발생하고 이것이 유행하면 이 철학에 알맞은 건축이 탄생한다. 이것은 다시 사회가 발전하면 질곡으로 변화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철학이 탄생한다. 이것이 탄력을 얻으면 집의 모습도 변화하는 철학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것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이런 작용은 일어나고 있다.

삼국시기에는 가치기준의 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에서 율종이 일어난다. 힘있는 자가 아무 것이라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를 줄 아는 감관을 기르라는 것이다. 이때에는 부처님의 탑이 절 가운데에 들어선다. 그러나 세상은 법이 지배하는 것이지 전륜성왕같은 임금 개인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탑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유식 유가종이다. 그러나 세상은 티끌 속에 우주가 담겨 있듯 민중들의 고단한 삶도 존중되어야 한다. 다시 2개의 탑이 부정되고 1개의 탑이 되며 5층으로 탑을 장식하게 된다. 다음은 선종이다. 민중의 생활 향상이 목적이다. 교리만 연구하고 있어서는 민중들의 삶이 나아지질 않는다. 스님이 직접 농사를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언제 책을 읽고 연구를 할 것인가? 한꺼번에 깨닫는 선종이 유행한다. 이때는 부도탑 - 조사탑이 중요한 신앙 요소가 된다. 

사찰이 직접 생산에 참여하여 지나친 이윤추구로 말미암아 민중들의 삶은 도탄에 빠진다. 자신의 소비욕구를 줄여야 한다는 성리학이 새로운 세상을 연다. 모든 집이 작아지고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이 발생한다. 등등 우리나라 건축 전반의 경향을 일별해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중략.
우리나라 한옥의 공간은 일단 사변적이고 철학적이다. 1차적 감각기관인 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라고 1차적 감각기관에 의지하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이후 상업자본이 성장하던 시기, 상업자본가들이 집을 지을 때는 철학적인 가치관은 없었다. 대웅전을 크게 짓거나 혹은 아름답게 지었다. 전자의 경우는 논산 쌍계사를 들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강화의 정수사 법당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눈이 만족하는 1차적 감각기관에만 의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건물군들을 종심 축 깊숙히 배치한다던가 혹은 자신이 주창했던 예법에 맞추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건축공간을 구성해 나갔다. 어떤 경우에는 축선을 맞추어서 대체로 좌우대칭형 배치를 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공간의 흐름이 산골 개울을 따라 흐르는 개울창의 물처럼 구성하기도 한다. 혹은 어떤 경우에는 지세에 맞추어 집들을 적당히 틀어두기도 하고 혹은 지형을 고쳐서 자신이 지을려고 하는 집의 축을 고집하는 수도 있다.

조계종 선 사찰에서는 空觀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마당을 비우고 사방을 집의 벽과 처마로 에워싸고 있다. 가끔 탑을 쓰는데 네모난 마당의 한쪽의 치우쳐 세움으로서 공간에 움직이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기도 한다. 또한 루마루 밑을 통과시키기도 하고 혹은 돌아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공간을 원근으로 포착하거나 시간으로 인식하는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특히 성리학에서 중요시했던 것은 예법으로서 주와 객의 위치와 움직임이 하나의 극적 공간구성이 되도록 처리했던 점이 재미있다. 일본의 차도가 아름다움이듯 우리의 공간구성과 이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공간의 연속은 하나의 극적 요소가 되도록 조직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장 간단한 기승전결의 율동으로부터 혹은 4계절의 율동, 또는 요즘과 같은 복잡한 극적 구성까지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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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모두 공간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공간론에 집중하는 한국건축학계의 분위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 편향성에 대해서 다시 여기서 첨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소개하는 것은 굵은 체로 표기한 부분으로 조선 후기, 즉 성리학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모든 집이 작아지고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이 발생했다는 부분부터입니다. 즉, 임란 이후 조선후기이지요.

'모든 것이 작아지고, 자연순응'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싶습니다. 네, 바로 고건축만이 아닌 한국전통 미학의 주류담론인 '소박미, 담백미, 자연미'입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의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짚고자 하는 부분은 마지막 문단입니다.

우리나라 한옥의 공간은 일단 사변적이고 철학적이다. 1차적 감각기관인 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라고 1차적 감각기관에 의지하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이후 상업자본이 성장하던 시기, 상업자본가들이 집을 지을 때는 철학적인 가치관은 없었다. 대웅전을 크게 짓거나 혹은 아름답게 지었다. 전자의 경우는 논산 쌍계사를 들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강화의 정수사 법당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눈이 만족하는 1차적 감각기관에만 의지했다는 뜻이다. 

죄송하지만 모두 전혀 공감할 수 없습니다. 일단 처음부터 한옥(이 역시 조선후기로 한정할 때)의 공간은 사변적이고 철학적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사변적이고 철학적이라고 함은 결국 '형이상학적'이란 뜻입니다. 공간자체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공간으로 인해 한옥이라는 고건축의 모든 면이 '형이상학적'인 미로만 귀결되는 편중된 현상을 종종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저 알쓸신잡의 교수님이 그러했고, 우리는 방송및 저서, 논문등을 통해 무수히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미학을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보아왔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반대급부를 대하는 태도에서 발생합니다. 즉,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을 마치 성리학자들이 그러했든 무시하고 심한 경우 경멸하는 태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신 노교수님의 태도 역시 그러함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이후 상업자본이 성장, 그 자본가들이 지은 집은 양반집과 달리 형이상학적 미가 없었고, 크고 아름다움에 집중했다는 비판을 신랄하게 하고 계십니다. 사찰의 대웅전도 크게 짓고 아름답게 지어서 결국 하고싶은 말씀은 '한국적 미'가 없고 깊이가 없는 건축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 전혀 공감할수도 오히려 안에서 반감이 불쑥불쑥 튀어오르는 비판입니다. 사변적이고 철학적이지 않고, 크고 아름다움에 집중하면 그건 한국의 미학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화려한 고려문화는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의 주류 미학에서 벗어난 이단아가 될 뿐입니다.

자, 다음은 윗 글에서 신랄하게 비한하고 있는 논산 쌍계사 대웅전입니다. 즉, 크게 지어서 싫다는 뉘앙스를 풍기신 그 대웅전이지요.
논산 쌍계사 대웅전 (보물 408호)

과연 스님들과 건축의 비율을 보니 꽤 큰 건물입니다 (다른 나라의 유명한 고찰대웅전에 비하면 큰 것도 아닙니다만). 그런데...무슨 문제라도? 대체 이런 큰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건축이 뭐가 잘못된 것인가요? 적어도 필자는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두번째로 비판하신 '아름다움에 집중한' 강화의 정수사 법당입니다.
정수사 법당 (보물 161호)

과연 단청도 화려하고, 
법당의 문살도 매우 장식미가 대단합니다. 화려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고건축미에 안 맞으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문장이 압권입니다.

"말하자면 눈이 만족하는 1차적 감각기관에만 의지했다는 뜻이다."

네, 1차감각인 눈이 만족합니다. 거기서 그치면 안될까요? 아니, 엄밀히 말해 거기서 더 나아가면 좋은 일입니다만, 필자는 절대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미를 먼저 세우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연역적 접근이 바로 한국의 대부분의 미학을 추상적이고 실제적인 미에서 멀어지게 만든 주 원인임을 이제는 거의 각 분야에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문화는 아는 만큼 보인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맞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필자의 사견입니다. 

보이는 만큼 아는 것이 먼저다. 그 다음은 아는 만큼 보인다. 

김홍식교수께서 말씀하신 1차감각인 눈이 받아들이는 '미美'가 우리 뿐 아니라 인류전체가 느끼는 가장 원초적이고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美임을 생물학(발생학)적인 관점에서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도, 그리고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필자는 거의 확신합니다. 몇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이 선후조건의 반대가 '주류'가 된 특이한 우리문화계의 근본원인에 대해서도 다른 글 (앞선 글들)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일찌기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였던 장현광(張顯光, 1554~ 1637년)은 이런 글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 분과 글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에서 더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凡物苟有矣 무릇 물건이 진실로 있으면 
必當爲所知也 반드시 알려지게 된다. 

知因於有 아는 것은 있는 데에서 연유하고
不知因於無 알지 못하는 것은 없는 데에서 연유한다. 
故有而知 그러므로 있으면 알고 
無而不知者 없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理之常也 떳떳한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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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역시 이야말로 떳떳한 이치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덧글

  • 함부르거 2021/04/26 10:40 #

    과거의 유산을 평가할 때는 일단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편협하고 관념적인 틀을 설정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무조건 폄하하는 경향이 많은 거 같아요.
  • 역사관심 2021/04/29 06:48 #

    제 주장이 그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눈으로 보이는대로', '문헌에 쓰여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우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든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는 태도. 많이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 rumic71 2021/04/26 14:20 #

    갓 크기까지 경쟁붙어서 규제하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크고 아름다운'걸 추구하는 게 한국적인 게 맞을 것 같은데 말이죠.
  • 역사관심 2021/04/29 06:49 #

    ㅎㅎㅎ 사실 그건 어느 나라나 공통의 인류의 자연스러운 욕망이겠죠. 그걸 이런 저런 이유로 자제하고 누르고, 어떤 시대에는 이것이 칭송받고 다른 시대에는 저것이 칭송받을 뿐...
  • 존다리안 2021/04/26 15:16 #

    그런 의미에서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역시도 그리 맞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 냥이 2021/04/26 18:28 #

    일본에서 한때 유행했다던 미니멀리즘도 어떤 대지진 이후로 나온 말로 들은적이 있네요.
  • 역사관심 2021/04/29 06:50 #

    사실,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떤 특정 국가나 사회집단을 한 두줄로 평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중입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구요.
  • 냥이 2021/04/26 18:32 #

    화려함과 거대함이 죄라면 경복궁과 그 외 궁궐은...
  • 역사관심 2021/04/29 06:50 #

    코에 걸면...
  • 백두 잊혀진 역사여행 2021/04/30 12:58 #

    개인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조선초기와 후기. 바로 그 사이에 문화적으로도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사치의 기준은 조선후기보다 훨씬 관대하였으며(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신하들이 사치로 논하는 부분에서 특히나 잘 드러납니다.), 오히려 신하가 행궁을 짓자고 청하는(세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등 사찰과 궁궐, 심지어 임시로 머무는 행궁과 이궁 조차도 청기와를 올리고 그 일대 부지를 후원으로 조성하는 등 조선 후기에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였으니.. 대표적인 예시가 청기와를 덮었던 회암사와 장의동 이궁, 그리고 조선초기에 태종을 위해서 한성부 인근 4군데에 지어졌던 이궁들이죠.(각각 연희궁, 포천이궁, 대산이궁, 풍양궁)(이 부분은 제가 추후에 더 자세히 포스팅 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이궁들조차 고려시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사실또한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쩌면 한국 문화가 더 발전하고 알려지기 위해서는 조선이 사치를 엄격히 금하였다는 편견부터 사라져야할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21/04/29 07:03 #

    동감합니다. 사실 항상 제가 주장하는 바 중에 하나인데 임란을 전후로 조선은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번 반강제 개국을 다시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조선 500년도 그럴진대, 긴 한국의 역사를 아우르는 미학을 이런 식으로 규정짓는 일부학계의 작금의 태도는 크게 불만스러울 수 밖에 없네요.
  • 응가 2021/05/04 17:15 #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저는 이런것 역시 일본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좋던, 나쁘던 간에, 일본에서 이미 와비사비라는 검소의 미학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개항이후 어니스트 페놀로사가 도쇼쿠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화려함보다 와비사비의 미학을 더 가치있게 쳐서 그러인한 미학이 더욱 확대가 된데다,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에 왔던 일본인 미술가, 야나기 무네요시부터 시작해서 이런 와비사비의 아름다움을 크게 쳐서 고려청자, 조선은입사공예같은 치밀하고 화려한 분야는 상대적으로 묻힌감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러한 미학이 공예 외에도 다른 부분에도 함께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려시대도 그렇고, 조선시대도 그렇고 다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부분과 검소한 부분은 함께 존재하는데, 그러한 부분은 다들 묻히고 일편적으로 고려=화려, 조선=검소 는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또한 초기에 조선미술이 정리될때, 일본의 화려함과 조선의 화려함은 그 방식이 다른것 또한 존재하는데 그 것 역시 간과되는게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흙담으로 만든 아주아주 검소한 차실부터 금박을 펴 바른 금각사나 아주 웅대한 도다이지, 온갖 무늬를 넣어 짠 비단으로 만든 기모노를 입지만 머리장식인 칸자시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한 일본의 마이코처럼 일본은 극과 극을 달리지만,
    조선은 검소를 표했지만 그래도 궁궐과 사찰에는 화려하고 빼곡히게 단청을 했고 작은 법당도 있지만 시주에 따라 큰 법당역시 존재하고, 종묘나 궁궐은 위엄에 맞춰서 장업하게 장식하거나 엄숙하게 칠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럽게도, 지나치게 검소하게도 하지 않았으며, 단정하게 쪽을 지고 소복담장을 하지만 정재에는 오색의 가무복을 입고 반지, 노리개, 귀걸이, 뒤꽂이까지 많은 장신구를 치장하고, 집에는 자기보다 비싼 놋그릇을 쓰며 사는데 한, 일의 문화는 비슷한 부분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너무 다른 부분도 많지 않느냐는 거죠.
    그래서 개인적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일본문화에 대한 관점을 보고 크게 동감한 바 있습니다.
  • 응가 2021/05/04 17:27 #

    하다 못해 구한말에도 일본예습에서는 상상도 못할 부분이 크게 엿보이는데, 결혼식에 남자는 사모관대에 여자는 활옷을 입는데, 사모관대는 좀 애매하지만 활옷을 입는다는 부분에서는 결혼식에 입는 옷을 궁중의 법도와 같이 하는것이 일본에선 일반인 가정의 결혼식에 쥬니히토에를 입는것과 같은 부분이죠.(해당 부분은 조선 중기이후 실록에 심심치않게 등장하는 사치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데 한국의 미학, 특히 조선시대미술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건 큰 안타까움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의 화려함이 묻히는 부분은 크게 아쉬움이 많습니다. 당장 구한말 독일에서 수집해 간 그 시절 유물들만해도 지금 관점으로 세밀하고 화려한게 많습니다. (https://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502&info_idx=686&bunya_cd=427&report_cd=387)
  • 역사관심 2021/05/06 22:13 #

    항상 좋은 정보와 깊이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저 역시 천편일률적으로 한 시대를 (그것도 고려, 조선처럼 무시무시하게 긴 역사를) 판단하고 간단하게 정의내리는 일부터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든 범주화하려는 인간의 속성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어니스트 페놀로사 부분은 예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제대로 파고든 적이 없는데, 초기 한국미학자들과의 연관성여부에 대해 한번 조사해 볼 계획만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조선시대는 거대미학은 확실히 없지만, 화려한 부분은 정말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글중 화개장같은 부분은 정말이지...(그리고 예전에 소개했지만 일본의 단순한 바둑판과 비교되는 화려한 조선식 바둑판등).

    모든 걸 떠나 한국의 대중적 주류미학은 이제 한번 제대로 치밀하게 재고할 시점이 된 느낌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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