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누각- 침루(寢樓)기록 추가 (16세기) 한국의 사라진 건축

예전에는 번역이 안되어 소개하지 못하고 저서이름만 아래 [침루]관련 시리즈에 소개했던 [소재집]의 침루기록입니다. 이제 완역이 되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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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 제4권 / 시(詩)
꿈을 깨고 나서 울면서 쓰다 11월이다.〔夢覺泣書 十一月〕

양친은 자리 나누어 다락 가운데서 주무시고 / 雙親分席寢樓中
몸에 딸린 한 어린애는 난간 동쪽에 누웠네 / 一稚隨身臥檻東
이게 바로 신유년 동짓달 스무날 밤 꿈인데 / 辛酉中冬廿夜夢
기억해 보니 길한 꿈도 흉한 꿈도 아니구려 / 記來非吉亦非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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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양친은 자리나누어 다락 가운데서 주무시고'라고 해석했는데 다시 표현하자면:

雙親分席寢樓中
부모님은 자리를 나누어 '루'에서 주무시다.

이 기록은 조선전기의 문신, 노수신 (盧守愼,1515~1590년)의 [소재집]에 등장하는 기록입니다. 역시나 임진왜란 이전, 조선전기이지요. 포스팅 아래 정리한 중층의 자는 누각 기록들에 이어지는 작은 정보입니다.

그리고 최근 읽은 이종서 교수의 [안동 “임청각(臨淸閣)”의 건축 이력과 원형 가구(架構) 추정](2016)을 통해 역시 임진왜란 전후로 많은 조선전기 저택들의 변형을 문헌상으로만이 아닌 실측적으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한 이 노수신 역시 이 변혁기의 인물이지요.

논고중 일부 관련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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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은 중앙에서 번성한 명문 가문의 인물이1500년대 전반에 지은 건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임청각은 조선전기에 상급 양반층이 선호하고 희구했던 주택의 한 유형일 가능성이 크다.

임청각은 1519년 무렵 이명이 ‘임청각’이라는 명칭의 정각을 지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살림집으로서의 임청각은 이명의 아들 이굉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1540년경에는 사당까지 지었다고 추정되므로, 임청각은 이 무렵에 대략 현재와 같은 평면을 갖추었다고 짐작된다. 살림집으로서의 임청각이 조선전기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중층공간이 배치된 익랑과 행랑의 높은 입면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임청각’, 즉 현재 군자정으로 부르는 정각은 지금도 대부분 초창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임청각 안채와 아래채의 중층구조 (이종서, 2016, 36쪽)

기록에 따르면 임청각의 살림채는 임진왜란 때에 명군의 실화로 큰 손상을 입었고, 1634년 무렵에도 또 한번의 화재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화재로 손상된 부분은 안채의 동쪽 익랑 부분에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래 중층구조였던 동쪽 익랑이 화재로 소실되자 1626년경에 단층으로 재건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임청각 살림채에서는 화재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의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는 상류주택에 온돌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임청각에서도 온돌이 없던 공간에 온돌을 설치하였다. 현재 남쪽사랑채는 서쪽 온돌방 두 칸과 동쪽 판방 한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서쪽 두 칸에 온돌을 설치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구조와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 안채 행랑 서쪽 칸의 누하부도 본래는 개방된 공간이었으나 후대에 다락을 들어 올리고 지하에 구들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방을 만들었다. 임청각 살림채는 본래 온돌이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시설되었는데 상류주택에 온돌이 보편화됨에 따라 구조를 변경한 것이다.

이렇듯 화재로 인한 복구와 편법적인 수리, 온돌 도입으로 인한 구조 변경 등의 이력을 통하여 임진왜란 이전 임청각의 안채와 사랑채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임청각의 남쪽사랑채는 두 칸의 동쪽 판방과 한 칸의 서쪽 마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채는 기단 위에 무고주 오량 구조의 대청과 대청 좌우의 방이 있었다. 여기에 중층구조인 동·서 익랑이 교차하고 역시 중층구조인 행랑이 익랑과 교차함으로써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평면과 입면을 갖추었다. 이 영역을 기본으로 하고 좌우로 공간을 확장하여 사랑채와 곁채를 형성했으며, 다시 하단부에 아래채를 지음으로써 공간구획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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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서 교수의 임청각 안채 원형추정도. 현재 사라진 부분이 행랑으로 이어져 있으며 이 경우 저 ㄷ자 구역은 모두 벽체를 가진 내부 중층 복도(익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바로 이 장면이 연상되지요.

眉巖先生集卷之七
眉巖日記 권 3, 癸酉(1573년) 3월 27일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己巳
○日昳歸舍。見兵曹望定。以希春爲禫祭時御前獅子衛將。來九日宣仁門罷漏時。開門。諸將受牌。軍士聚會。自太平館至議政府禮曹習儀。當具弓箭筒介大刀云。“日昳歸舍 冒微雨著笠帽 是 日之出也 夫人詣廊樓上觀之”; 朝鮮史編修會 編, 중략.

冒微雨著笠帽 비가 조금 와 삿갓 (립)을 착용했다.
夫人詣廊樓上觀之 부인이 낭루에 올라 보며 배웅했다.

이 기록은 조선전기 문신인 유희춘(1513 ∼1577년)의 일기인 [미암선생문집]의 '일기'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정확히 1573년의 기록인데, 이 당시는 1567년 이후 그가 부제학, 대사간등을 역임하던 최고위 관리였던 시절이지요. 따라서 이 집은 한양의 고위관리 저택이었다 보면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를 배웅하는 부인이 그날따라 비가 오자 바로 ‘낭루(廊樓)’라는 구조물에 올라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겁니다. 낭루란 말 그대로 廊 행랑 랑 樓 다락 루, 즉 중층형태의 행랑을 뜻합니다. 행랑은 길게 뻗은 건물채이므로 저런 형태의 건축도 포함될 것입니다.

시기는 역시 1570년대로 노수신의 기록과도 임청각의 역사와도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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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예전에 살펴본 노은리 고택처럼 원형을 복원한 그림나 설계도가 논문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현재 임청각 복원계획이 있던데, 이런 연구들을 기반으로 부디 조선전기 저택의 한 예로 훌륭하게 복원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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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대범한 얼음대마왕 2021/09/24 20:28 #

    안동에는 지금 만들어지는 현대 한옥이나 남아있는 한옥들과는 판이한 포멀의 고택들이 많이 있었지만 정작 한국은 조선 후기의 한옥 원형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규제를 걸었습니다. 전주에서도 2층 한옥은 안된다 얘기가 나오기도 했고요. 때문에 최근 우후죽순 생겨난 한옥촌들을 보면 참 똑같다라는 감상을 받습니다.
    반면 일본 가옥들이 각각 개성과 지역성이 묻어있다라는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17세기 상공업이 발달한 이후로 기능에 따라 모양이 변하고 생활에 맞게 특화되는 등 건축에 대한 담론이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량 한옥은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출발한 학문인 이상 일본과는 다른 방향을 가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담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규제는 보존이 아닌 경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옥의 수요가 높아질텐데 한옥의 역사는 지금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날 평양 사진에 보이던 다양한 한옥들을 보고 싶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27454#home
  • 역사관심 2021/09/26 01:02 #

    맞습니다. 현재 우리의 한옥정체성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조선후기에 너무 함몰되어서 이전시대 것은 들여다 볼 생각조차 안하고 있지요. 항상 이야기하듯 우리의 언밸런스한 통시적이지 못한 한국미/한국학의 산물같습니다. 중국이나 일본만 해도 어떤 성이나 누각을 소개할때 항상 통시적으로 시대별 모형이나 그림을 관광객에게 충분히 보여주기에 일반 시민들도 그런 프레임이 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 심하죠.

    기사내용이 좋네요- 언제 한번 포스팅해보고 싶습니다 (저 역시 평양한옥들이 너무 궁금하네요- 분명 북한쪽에 훨씬 많은 자료들이 남아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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