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양성곽 높이와 경복궁 성곽 높이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현재 한양성곽을 소개하거나 경복궁을 소개할때 활용하고 있지 않은 귀한 정보가 많습니다. 특히 '성곽높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는 기록들은 소개문에 없는 것이 의아할 정도입니다. 일단 한양성곽 사이트에 소개된 정보를 볼까요.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반면 경복궁 성벽에 대한 정보는 경복궁 사이트는 물론 어떤 곳에서도 제대로 찾기가 힘듭니다. 비공식적으로 필자가 파악해 보는 높이는 4미터에서 5미터 정도로 유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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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최초에 한양성과 경복궁을 건설할 당시에는 어떠했을까요? 고맙게도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보충해서 1530년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다음이 한양성과 경복궁에 대한 묘사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京都上)
城郭 京城。
我太祖五年,用石築之。世宗四年改修。周九千九百七十五步,高四十尺二寸。立門八:正南曰崇禮,正北曰肅淸,正東曰興仁,正西曰敦義,東北曰惠化,【國初,號此門曰弘化;成宗癸卯,名昌慶宮東門亦曰弘化。今上六年,以兩門名混,改之曰惠化。】 西北曰彰義,東南曰光煕,西南曰昭德。
宮城。在京城之中。周一千八百十三步,高二十一尺一寸。立門四:南曰光化,舊名正門。北曰神武。東曰建春。西曰迎秋。

【성곽】 
경성(京城)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고 세종 4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둘레는 9천 9백 75보(步)요, 높이는 40척 2촌이다. 여덟 개의 문을 세웠으니 정남에 있는 것은 숭례(崇禮), 정북은 숙청(肅淸), 정동은 흥인(興仁), 정서는 돈의(敦義), 동북은 혜화(惠化),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이 문을 홍화(弘化)라 하였는데, 성종 계묘년에 창경궁(昌慶宮)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 하여, 지금 왕 6년에 두 문의 이름이 혼동되기 때문에 혜화라고 고쳤다. 서북은 창의(彰義), 동남은 광희(光熙), 서남은 소덕(昭德)이다.

궁성(宮城) 경성 복판에 있다. 둘레는 1천 8백 13이고, 높이는 21척 1촌이다. 네 개의 문을 세웠으니 남쪽의 문을 광화(光化)라 하는데, 옛 이름은 정문(正門)이었다. 북쪽의 문은 신무(神武), 동쪽의 문은 건춘(建春), 서쪽의 문은 영추(迎秋)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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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면 한양성곽은 태조때 만들었으며 세종대에 수리한 기록이 나오고, 이 수리한 당대의 높이가 나오지요. 
高四十尺二寸。높이는 40척 2촌이다. 

세종 4년에 수리한 기록이니, 당대의 '척'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당대척(唐大尺)을 영조척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영조척단위는 당시 건축물을 짓거나 가구를 짤 때도 가장 자주 사용한 단위지요. 조선이 영조척을 독자 제정한 것은 세종 (재위 1418~1450년)때부터입니다 (정확히는 세종 28년(1446년) 영조척 40개를 만들어 서울과 지방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영조척은 한 자의 길이가 30.8㎝ 정도였습니다. 

이 기록 즉, 동국여지승람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시기가 각각 1481년과 1530년이니 이미 세종보다 후대인 성종때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세종이 만든 영조척을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당시 영조척은 대략 30.8cm 내외이니, 그럼 30.8 x 40.2= 12미터 38센티가 나옵니다. 즉, 건설당시 한양성곽의 높이를 12미터 38센티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필자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지만), 4대문의 옆 성곽, 즉 성을 대표하는 성곽높이를 측정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고 사료됩니다. 당연히 산성쪽은 지금처럼 낮았겠지요.

실은 이러한 모습은 [가장 웅장한 부분이 유실된 한양성- 1884년 숭례문 인근 10-11미터 성벽구간] 포스팅에서 이미 살핀 것 처럼 19세기말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필자가 어림짐작으로 성벽위에 서 계신 조상님의 당시 성인평균키 (150~160센티)로 계산한 높이가 얼추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숭례문 동벽 사진 (1884년)

150센티로 잡으면 150*7= 10.5미터
160센티로 잡으면 160*7= 11.2미터

물론 이는 우연의 일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1400년대의 한양성곽이 1890년대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 사진을 통해 우리는 초창기 한양성곽의 웅장함을 어느정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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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경복궁 성벽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20척 1촌. 
高二十一尺一寸。높이는 21척 1촌이다. 

이를 세종대 영조척으로 계산하면 8미터 8센티미터가 됩니다. 그럼 구한말에도 이런 높이였을까요? 
20세기 초 추정 경복궁 담장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원경이기는 하지만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피사체와 대비해 보았을때 담의 높이는 약 5~6미터로 현재와 비슷해 보입니다. 1400년대 기록처럼 8미터가 되려면 최소 저 십자각 (성루)의 중간까지는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현재 읍성과 산성들만 익숙한 현대한국인들에게 8미터라는 높이는 생소하겠지만, 실은 개경(개성)의 대표적 성곽인 개성나성도 8~9미터 구간이 많았고 (27척), 천리장성 역시 8미터였습니다.

높이 8미터의 담장은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다음 사진은 현재 발굴된 백제의 풍납토성 복원 모형입니다. 이 토성은 10미터급으로 더 높지만 필자가 약 8미터에서 윗부분을 잘라낸 모습입니다.
이는 현재의 경복궁 담장을 생각하면 언뜻 그려내기 힘든 모습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국가 공식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측정기록이 과장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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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궁원(都城宮苑)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 城高鐵甕千尋
구름 둘렀어라 봉래 오색(蓬萊五色)이 / 雲繞蓬萊五色
연년이 상원에는 앵화 가득하고 / 年年上苑鶯花
세세로 도성 사람 놀며 즐기네 / 歲歲都人遊樂

삼봉 정도전 (1342~1398년) 역시 이미 [삼봉집]에 나오는 도성궁원, 즉 성곽과 궁궐을 묘사한 조선초기 시입니다. 공교롭게도 태조 이성계가 1395년(태조 4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려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성터를 조사측정시킨 사람이 바로 정도전입니다. 그리고 1396년 한양성곽을 완성했지요. 최초의 경복궁 역시 정도전이 주체가 되어 같은 1395년 건설한 것입니다.

8미터라는 이야기는 평균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궁궐 정면이나 일부의 웅장한 구간만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만 해도 전소되어 조선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어찌보면 신비의 궁궐입니다. 조선초기의 성곽이나 담장높이가 8미터라 해도 이를 실증적으로 구현해보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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