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들은 다 아시겠지만, 한국과 이란은 분명 축구에 관한한 아시아에서 자웅을 겨루던 라이벌입니다 (과거형을 잠시 쓰는 이유는 케이로스의 2010년대 이후 균형이 무너진 상태이므로...빨리 다시 현재형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또 1996년 아시안컵, 8강전에서 2:6의 대패를 당한 치욕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사실 이란과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한골차나 기껏해야 두골, 최대 서로 세골차로 이긴 게 전부일 정도로 이 패배는 의아할 정도였지요. 어느 정도였냐하면 이 경기는 축협과 사이가 좋지않던 당시 국대감독이었던 박종환 감독의 강압적인 방식에 축협라인이었던 많은 선수들이 반기를 든 결과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반전만 해도 2:1로 이기던 경기였지요. 그러던 것이 후반전 들어 거의 전 선수들이 설렁설렁 뛴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걸어다니며 무려 5골을 헌납, 저런 대패를 당했으니 일반인들의 눈에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까지 개인적으로 들었었냐하면 오직 출전선수중 연고대라인이 아닌 조선대출신의 야생마 김주성만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인지라 찻잔속의 이야기로 끝났지만, 요즘같으면 엄청나게 파장이 커질 수도 있었던 이야기였지요. 오죽하면 지금도 '나무위키'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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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도 아니고 고작 아시아 무대에서 졸전 끝에 전례없는 참패를 당하자 국내 언론과 팬들은 일제히 대표팀을 향해 비난의 십자포화를 쏟아냈다. 특히 감독이었던 박종환을 향한 비난은 더욱 거셌으며, 19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FIFA U-20 월드컵 전신) 4강 신화와 성남 일화 감독 시절 이룩한 K리그 3연패로 쌓아올린 명성은 이 한 경기로 모두 무너져 내렸고,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자진 사퇴하게 된다.(사실상 경질)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반전에 미쳐 날뛰었던 이란 선수들을 걸어다니면서 막은 것이 논란이 되어 집중포화 식으로 강도높은 비난을 이어졌고, 특히 전반전까지만 해도 2-1로 앞서다가 후반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다른 팀이라도 된 것 마냥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일각에선 태업 논란까지 일어났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이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홍명보였으며 대표팀에서 음주파동까지 일으켰던 사조직 "열하나회"에 가입되어있었던 점은 의혹을 증폭시켰다.
물론 태업에 대한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홍명보 본인의 자서전에서 가장 슬펐던 경기로 이 경기를 꼽았었고, 당시 대표팀에 박종환의 애제자들인 고정운, 신태용, 박남열, 박광현, 이영진 등 일화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업의 가능성은 많지 않다. 당시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과 박종환 감독 모두 이 논란에 대해 따로 해명을 한적도 없고 사실상 의혹만 있을뿐 물증이 전혀 없는 관계로 아시안컵에서 있었던 아직까진 단순한 루머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수들과 잦은 충돌을 부르게 만든 박종환 감독의 지도 방식을 놓고 본다면 논란이 크게 번질 소지를 나타내준 예시가 된 만큼 경기가 끝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시간이 지나 2021년, 이란과 다시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맞붙고 있는 요즘, 이때가 생각이 나서 한번 예전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과연 저 '태업론'은 기록으로나마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전혀 근거없는 그냥 홧김에 나왔던 낭설이었을 뿐이었을까.
찾아보던 도중 그 '근거'로 추정해 볼수도 있는 흥미로운 기사가 두 개 있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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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당시 바로 나왔던 기사인 1996년 12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제목부터 '선수-감독 '두마음' 올것이 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균연령 26세가 높다는 희안한 내용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이미 이란전 이전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수들이 '워킹 사커 (걸어다닌다는)'를 선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같은 선수들의 행동은 우승하면 모든 공은 감독의 몫이 된다는 생각때문"이라는 입이 벌어지는 내용이 뒤이어 나오지요.
무엇보다 태업이란 단어가 그냥 기사에 나오고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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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실마리가 보이는 내용은 다음해 이 경기로 인해 결국 국대감독자리를 내놓은 박종환감독의 고별인터뷰에 나옵니다.

마지막 문단에 나옵니다. "전세계 어떤 감독이 맡았더라도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을 것". 이 말에는 그 당시 선수들의 태업에 대한 진한 뉘앙스가 풍겨나옵니다. 선수들이 안 뛰는 데 명장들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뜻으로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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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란은 이 경기를 빌미로 한국에 심심찮게 놀림을 하는 형국입니다. 이 '태업론'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 언젠가는 누군가 밝혀주면 좋겠네요.
덧글
이 부분에 대해서 저와 윤형진군은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태업론 관련해서는 당시 대표팀 선수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서 이야기했던 적도 있구요...
물론 선수들은 그 당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날카로운 문제였거든요.(선수 몇몇분들과의 만남은 1996년 12월 모 선수의 결혼식장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트랙백을 해야겠습니다만...
언론과는 달리 저와 윤형진군이 내린 경기 분석은 그야말로 당시 코칭스탭의 크나큰 오판으로 결론내린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