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백귀야행기록- 밤에 길을 가며 기이한 일을 기록하다〔야행기이, 夜行記異〕 설화 야담 지괴류

일본에는 '백귀야행'이라는 유명한 요괴들의 야간행진이 있습니다. 특정날 한밤중 요괴들이 행진하며 출몰한다는 이야기지요.

画図百鬼夜行 (1776) 중

그런데 조선시대 중기, 조경(趙絅, 1586~1669년)이 지은 [용주유고(龍洲遺稿)]에는 이런 기이한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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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유고 제5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야행기이 (밤에 길을 가며 기이한 일을 기록하다〔夜行記異〕)

기사년(1629, 인조7) 7월 / 蛇年建申月

나는 과천에서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네 / 我自果還洛

마을에선 내가 떠난다는 소식 듣고 / 里巷聞我行
술을 가져와 가득 따라 권하였네 / 提壺勸深酌

새로 이사하여 인정이 아쉬워 / 新居惜人情
손 저으며 물리칠 수 없었네 / 不能揮手却

일어나려 하면 그때마다 잡아끌어 / 欲起輒遭牽
그대로 배불리 먹고 즐겼네 / 仍得一餉樂

취한 뒤에 즉시 말을 타니 / 醉後卽騎馬
서쪽 봉우리에 해가 지려 하네 / 西峯日欲落

말을 재촉하여 여우고개 넘으니 / 促鞭上狐嶺
어두운 안개에 뭇 골짜기 깜깜했네 / 暝煙盲衆壑

때는 스무날과 그믐 사이라 / 維時念晦交
칠흑같은 밤에 달도 없었네 / 夜黑無月魄

지척에서도 홀연 길을 잃는데 / 咫尺忽迷路
원근을 어찌 다시 헤아리리오 / 遠近誰復度

말을 채찍질해도 말은 가지 않고 / 策馬馬不前
어린 내 종은 울며 눈물 흘리네 / 號泣我僕弱

골짜기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 或墜坑谷底
자갈밭에 넘어지기도 했는데 / 或礙石犖确

사방을 둘러봐도 행인은 없고 / 四顧無人行
그저 갖가지 괴이한 것만 보이네 / 但見百怪作

요상한 여우가 온갖 모습 나타내고 / 妖狐逞千態
산기는 외다리 자랑하네 / 山夔誇一脚

푸른 도깨비불 숨었다 나타났다 / 碧燐遞隱見
두억시니 다투어 뛰쳐나오네 / 魍魎爭踊躍

내 앞에선 범이 다시 울부짖고 / 我前虎更嘯
내 뒤에선 곰이 또 덮칠 듯하네 / 我後熊又攫

어지러워 앞이 보이지 않는데 / 紛紛未前見
불쑥불쑥 번갈아 출몰하네 / 出沒互參錯

군자는 비록 천명을 알지만 / 君子雖知命
마음속에 오싹한 느낌 없지 않아서 / 心中不無惡

칼 뽑아 한번 휘둘러보니 / 拔劍試一揮
괴이한 귀신이 더욱 행패를 부리네 / 怪鬼益來虐

홀연 사람이 있는 듯하여 / 忽然若有人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네 / 與我相唯諾

나는 기뻐서 내 종에게 말하길 / 我喜謂我僕
내 여행길 이제 의지할 이 생겼단다 / 我行今有託

따라가다 열 걸음도 못 가서 / 隨之未十步
내 종은 묶인 것처럼 꼼짝 않았네 / 我僕若束縛

고삐 잡고 이유를 물으니 / 攬轡問所以
말은 않고 학질 걸린 것처럼 벌벌 떨었네 / 不語如戰瘧

그제야 저것이 사람 아닌 줄 알았으니 / 始覺彼非人
하나하나 경악스러운 일이로구나 / 一一事可愕

말에서 내려 내 종을 달래며 / 下馬撫我僕
마침내 가던 길에 멈추어섰네 / 遂於行處着

그저 하늘이 밝아지길 기다리며 / 直待天且明
움츠린 자벌레처럼 숨을 죽였네 / 屛息如屈蠖

잠시 후 새벽 햇살이 비치니 / 須臾曙色來
두 눈이 백태를 긁어낸 듯 시원했네 / 兩眼快括膜

밤에 가던 길 돌아보니 / 回視夜行路
수풀에 가시나무 섞여 있네 / 荊棘雜林薄

아이종은 성한 피부 없고 / 僕僮無完肌
행낭은 온통 진흙투성이 / 泥濘渾行橐

간신히 강가 마을로 내려오니 / 艱關下江村
사람과 말이 어찌나 피곤한지 / 人馬困何若

나루의 아전이 나를 맞이하여 묻는데 / 津吏迎我問
말을 하려니 낯이 먼저 붉어지네 / 欲語顏先怍

부디 오늘 이후로 / 庶從今日後
길을 가면 어제 일로 경계하리 / 有行戒以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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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인공인 조경은 17세기당시 대제학,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명망높은 분으로 병자호란당시 강경파에 속한 인물입니다. 그가 과천에서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겪은 기이한 일입니다.
조경(趙絅, 1586~1669년)

1629년 (당시 44세) 어느 날 조경은 과천마을 사람들에게 거나하게 술대접을 받게 되고, 이에 본의아니게 늦은 밤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당시 이미 '여우고개'라 불리던 '남태령'을 지나게 됩니다. 원문에 '여우고개'라고 써 있으므로 이미 17세기초에도 남태령이 여우고개로 불리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促鞭上狐嶺 (여우 호, 고개 령)
채찍질하여 여우고개를 넘어가다

이 날 밤 이곳에서 그와 종자는 온갖 요괴들을 만나게 되니... 하필이면 그믐날이라 달빛조차 없는 밤이었습니다. 그와 종자앞에 나타난 요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妖狐逞千態  요호(요괴 여우)는 천가지 모습으로 변신
山夔誇一脚  포박자 [抱朴子 釋滯]에 나오는 독각귀의 일종인 산기(山夔)가 외다리로 뛰어오고
碧燐遞隱見  푸른 도깨비불이 나타났으며
魍魎爭踊躍 두억시니(망량- 도깨비)는 서로 경쟁하며 나오게 됩니다. 
熊 범과 곰까지 울부짖고, 이런 것들이 번갈아 출몰합니다 (出沒互參錯).

보통 다른 기록에서는 이런 경우 담대하게 칼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면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 조선판 백귀야행에서는 어림없습니다.

칼 뽑아 한번 휘둘러보니 / 拔劍試一揮
괴이한 귀신이 더욱 행패를 부리네 / 怪鬼益來虐

그런데 여기서 더 기이한 일이 발행합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같은 것이 조경선생과 대화를 시작하게 되니, 그가 드디어 일행이 하나 늘었다며 기뻐서 곁의 종에게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이 종자는 기뻐하기는 커녕 갑자기 열 걸음도 못걷고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마치 학질이 걸린 것처럼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게 됩니다 (
말은 않고 학질 걸린 것처럼 벌벌 떨었네 / 不語如戰瘧).

그래서 말을 멈추고 종자에게 이유를 묻자, 말하길 대화상대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게 되고...
조경선생은 더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됩니다.

그제야 저것이 사람 아닌 줄 알았으니 / 始覺彼非人
하나하나 경악스러운 일이로구나 / 一一事可愕

정신적 충격이 너무 강했던 둘은 더이상 고개를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새벽이 올때까지 그저 기다리게 됩니다. 새벽이 밝아오자 정신없이 내려온 그들의 몸상태는 상처투성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1629년은 그가 암행어사로도 활동하던 해이기도 합니다. 왠만한 일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조경선생의 이런 생생한 공포체험은 이미 성리학의 교조화가 시작된 17세기 문헌기록으로는 흔치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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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南泰嶺)

여기 나오는 '여우고개(호령)'은 지금의 남태령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듯 서울과 과천시 사이에 있는 야트막한 고갯길로, 지금도 인근주민들에게 여우고개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송상기(宋相琦, 1657~ 1723년)의 [옥오재집(玉吾齋集)]에도 이 곳이 '여우고개'라고 표기되어 있을만큼 유명했던 곳입니다 (이외에도 18세기 [변암집]에도 나옵니다).

과천에서〔果川〕
몇 번이던가, 과천에서 먹은 밥 / 幾喫果川飯
또다시 여우고개 넘노라 / 又踰狐嶺
-옥오재집

위키백과에 따르면 원래의 이름자체가 '호령'(여우고개)였을 가능성도 보이는데, 정조대왕이 고개이름을 묻자 관료들이 차마 '여우고개'라는 이름을 댈 수 없어 '남태령'이란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출처는 모르겠습니다).

남태령을 소개한 각종 넷상정보에도 여우고개로 불린다는 간단한 설명만 전할뿐, 이러한 조선시대 당대의 기담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듯 합니다. 이 기록을 소개하는 최초의 글이 아닐까 싶은데, 17세기초 당대의 남태령에는 여우뿐 아니라 이러한 요괴들의 출몰기록도 있다는 흥미로운 기록을 나누고 싶어 소개해보았습니다.



덧글

  • rumic71 2022/06/30 11:22 #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입니다.
  • 역사관심 2022/07/01 12:47 #

    시조인데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주셨죠.
  • 무명병사 2022/06/30 11:52 #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놀랍군요. 그것도 한창 성리학이 교조화되던 시절에...
  • 역사관심 2022/07/01 12:48 #

    저도 그래서 너무 신기했던 경험을 했네요. 어쩌면 아직은 17세기 초반이라 가능했을지도...
  • 존다리안 2022/07/02 21:41 #

    서양의 와일드헌트, 동양의 백귀야행 왜 이런 전승이 퍼졌을까요?
  • rumic71 2022/07/03 00:10 #

    프로야구도 여름엔 올스타전을 하죠. 아니 그보다도 10인 라이더 대집합에 가까운 발상이려나.
  • 역사관심 2022/07/03 04:44 #

    어두운 밤길, 숲길... 전근대시대에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공포가 있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무언가 어둠속에서 빛나거나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발동되는 상상력의 레벨이 지금과는 비교불가였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히 이런저런 착시와 헛것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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